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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후기

정한아 소설집 <술과 바닐라>(문학동네)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21. 9. 11.

 


요즘은 과거보다 못하지만, 초기에 대산대학문학상의 위세는 대단했다.
1회 당선자가 김애란 작가, 2회 당선자가 윤고은 작가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당선과 동시에 등단을 인정받고, 당선작은 계간 창작과비평 지면에 실리니 어지간한 신춘문예나 문예지 신인상 당선보다 권위 있고 실속도 있다.
그러다 보니 전국의 난다 긴다 하는 대학생 문사가 모두 공모를 노렸다.
내가 처음 응모했던 2005년 4회 공모의 소설 부문 당선자가 정한아 작가였다.
그런 인연(?) 때문에 나는 작가의 작품을 등단작부터 대부분을 따라 읽었다.

세월이 흘러 대학생이었던 작가는 나이가 들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됐다.
소설을 읽는 일은 값싸게 간접적으로 다른 인생을 경험해보는 일이다.
작가의 작품을 따라 읽는 과정은 작가의 변화한 삶과 내 또래 여성의 내밀한 고민을 엿보는 일이기도 했다.
작가는 작품 속 다채로운 여성의 삶을 통해 '슈퍼맘'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충분히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번 소설집에서 작가는 모성애와 한 인간으로서의 욕망 사이에서 고뇌하는 여성의 모습을 솔직담백하게 보여준다.
일하며 아이를 키우는 여성의 고뇌, 엄마인 나와 한 인간으로서의 나 사이의 충돌, 모성과 죄의식 사이에서 느끼는 혼란, 막연한 불안감이 작품 곳곳에서 섬세하게 드러난다.
소설과 작가 사이의 거리가 가까운 만큼, 그 어떤 다큐멘터리보다 현실감이 느껴졌다.
이 소설집은 지금까지 읽은 일하는 여성의 현실을 다룬 작품 중 가장 마음에 와 닿은 작품이었다.

작가의 첫 장편소설이자 문학동네 작가상 수상작인 <달의 바다>와 소설집 <나를 위해 웃다>를 읽으며 느꼈던 발랄함이 그립지만, 앞으로 작가가 나이를 먹으며 소설에 자신의 삶을 어떻게 녹일지도 기대가 된다.
독자로서 작가와 함께 나이를 먹어가는 건 꽤 괜찮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