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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후기

손홍규 장편소설 <예언자와 보낸 마지막 하루>(문학사상)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21. 9. 23.

 


목차부터 의미심장하다.
1895년 4월 24일. 1956년 7월 19일. 2009년 5월 23일. 2014년 4월 16일.
작품을 읽다 보면 첫 번째 날짜는 전봉준의 처형일자, 두 번째 날짜는 박헌영의 처형일자임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
세 번째 날짜와 네 번째 날짜는 굳이 작품을 읽지 않아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날, 세월호 참사가 벌어진 날임을 짐작할 수 있을 테다.

이 작품은 서로 무관해 보이는 사건들을 소설적 상상력으로 엮어냈다
작가는 방대하고도 치밀한 자료 조사 위에 자신만의 통찰을 더해 사건 속 죽음의 의미를 살핀다.
이 작품에서 네 죽음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실패'다
전봉준은 동학농민운동에 실패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고, 박헌영은 북한에서 사회주의혁명에 실패해 숙청됐다.
노무현은 자신이 꿈꾼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드는 데 실패한 뒤 죽음을 맞았으며, 세월호 참사는 국민을 보호해야 하는 국가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결과였다.

오늘날 우리가 죽은 이들이 꿈꿨던 세상보다 후퇴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적어도 2021년 대한민국 사회는 신분제 봉건제를 유지하고 있지 않으며, 사상의 자유를 대놓고 억압하지도 않고, 민주주의가 작동하고 있으며, 국민을 무책임하게 죽음으로 내몰지도 않으니 말이다.
죽은 이들의 꿈이 오늘날에 불완전하나마 실현됐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예언처럼 말이다.
이 작품은 '작가의 말'을 통해 "우리가 어떤 일을 했는지를 기록하는 게 역사라면 우리가 어떤 꿈을 꾸었는지를 기억하는 건 소설"이라고 말한다.
예언은 결국 삶을 이해하는 데에서 나온다는 의미일 테다.

작가가 작품 속 인물을 바라보는 시각에 온전히 동의하기는 어려웠다.
이 작품에는 역사에 이른 과거와 아직 이르지 않은 과거가 뒤섞여 있고, 작가가 작품 속 인물을 바라보는 시선은 온정적이다.
박헌영은 독립운동가이면서 동시에 한국전쟁을 일으킨 전범으로 평가가 극단으로 갈리는 인물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인간적으로 훌륭한 사람일지는 몰라도, 훌륭한 정치인이었는지는 의문이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데도 이 작품이 의미 있는 이유는, 최근 한국소설에서 찾기 드문 무거운 주제 의식과 통찰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서점에 가서 한 번 한국소설 신간 매대를 살펴보라.
다양성 면에서 과연 과거보다 나아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무게중심을 잡아줄 만한 작품이 오랜만에 등장한 것 같아 반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