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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후기

김하율 장편소설 <나를 구독해줘>(폴앤니나)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21. 12. 8.

 



청년 서사는 대체로 우울하게 그려지는 편이다.
취업률을 비롯해 청년을 둘러싼 각종 현실 지표가 우울한 게 사실이고, 우울은 전염성을 가지고 있다.
힘들고 슬플 때 웃는 자가 일류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그만큼 어려우니까 그런 말이 나오는 거다.
이 작품은 청년 세대의 우울한 현실을 보여주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슷한 주제를 다룬 기존 작품과 차별성을 보여준다.

주인공은 연이어 공무원 시험에서 낙방한 뒤 나이 서른에 강제로 독립을 당한 여성이다.
늦은 나이에 명동의 화장품 매장에 취업한 주인공은 어린 시절부터 '불알친구'인 남사친의 집에 얹혀살고 있다.
중국어는 물론 일본어와 한국어까지 잘하는 조선족 직원 사이에서 유일한 한국인 직원은 언제 매장에서 잘릴지 몰라 전전긍긍한다.
고객 대부분이 중국인인 데다 그나마 주인공이 상대할 수 있는 한국인 고객은 돈이 되는 물건을 잘 사지 않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매상을 올리고자 온라인상에서 익명의 드래그퀸으로 유명한 '불알친구'와 함께 유튜브를 시작한다.
처음에는 매장 점주에 오를 정도로 승승장구하던 주인공은 온라인상에 얼굴이 팔리며 원치 않았던 당황스러운 상황에 몰린다.
작가는 주인공이 궁지에 몰리다가 빠져나오는 과정을 시종일관 밝고 유쾌한 톤으로 그려 우울함을 느낄 틈을 주지 않는다.
가독성도 훌륭해 빠르게 페이지가 넘어간다.
오래전에 백영옥 작가의 장편소설 <스타일>을 읽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이 작품에서 특히 눈에 띄는 부분은 화장품 업계에 관한 디테일과 이에 관한 친절한 설명이다.
작품 곳곳에서 낯선 화장품 관련 용어가 튀어나오지만, 설명이 자연스럽게 서사에 녹아들어 있어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겨울에 로션도 안 바르고 사는 나도 이해에 어려움이 없었으니 말이다.
에스티 로더, 메이블린, 샤넬 등 유명 화장품 브랜드의 역사에 관한 설명을 비롯해 도브 비누가 미국 해병대 용품으로 개발됐고, 아이보리 비누가 실수로 개발됐다는 뒷이야기도 흥미로웠다.


'작가의 말'을 보니 실제로 작가가 화장품 매장에서 직원으로 1년 동안 일한 경력을 갖고 있었다.
명동 묘사가 상세한 이유도 작가가 명동 호텔프린스 입주작가였기 때문이었다.
작품을 집필하는데 참고한 자료 목록도 정리돼 있는데 그 분량이 상당하다.
화장품 매장을 오가는 인간 군상, 함께 일하는 조선족 직원 묘사도 다른 소설에선 보지 못한 신선한 디테일이었다.
역시 취재한 만큼 소설의 재미와 디테일이 산다.
코로나 펜데믹 이전의 시끌벅적했던 명동 거리가 그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