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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후기

이서수 장편소설 <헬프 미 시스터>(은행나무)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22. 4. 10.



나는 2017년 3월부터 2019년 4월까지 고용노동부 출입 기자로 일했다.
당시 내가 기사로 비중 있게 다룬 이슈 중 하나가 플랫폼 노동이었다.
플랫폼 노동은 일거리를 직접 선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근로계약을 바탕에 둔 노동보다 자유롭다.
플랫폼을 운영하는 업체와 고용 관계를 맺지 않아 법적 지위가 불안정하지만, 일할 시간이나 장소를 자기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코로나 펜데믹 이후 비대면 경제 규모가 커짐에 따라 플랫폼 노동자의 규모도 커졌다.
문제는 한국 사회에 장점은 사라지고 단점만 남은 플랫폼 노동이 넘쳐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많은 플랫폼 노동자가 플랫폼 운영 기업 소속 직원처럼 일하면서, 근로 계약을 맺지 않았다는 이유로 노동법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이 작품은 열심히 살았는데도 생계 위기에 내몰린 가족이 모두 플랫폼 노동에 뛰어들면서 겪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주인공 가족이 겪은 열악한 현실 묘사는 소설인데도 그 어떤 르포 기사보다도 절절하고 생생하다.
작가가 직접 경험해보지 않았으면 알 수 없는 플랫폼 노동의 디테일이 작품 전체에 넘쳐난다.
그럴싸한 문장으로 일천한 경험을 숨기고 실험이나 예술인 척 포장하는 '방구석 소설'과 비교해 묘사의 차원이 다르다.
먹고 사는 일의 치열함을 다룬 장강명 작가의 연작소설 <산 자들>, 부동산 시장의 현실을 다룬 조남주 작가의 연작소설 <서영동 이야기>와 함께 읽으면 대한민국 사회의 부조리가 실감 나게 눈앞에 그려질 것이다.
플랫폼 노동 관련 보고서나 교재로 사용해도 훌륭할 작품이다.

이 작품의 또 다른 훌륭한 점은 가슴 답답한 현실을 묘사하면서도 이를 어둡지 않게, 때로는 경쾌하게 풀어낸다는 점이다.
작품의 주요 등장인물이 여성인데, 이들은 오버하지 않는 선에서 서로를 위로하고 도우며 연대한다.
끈끈하지는 않아도 은근한 이들의 연대가 아름다웠다.
사이다 엔딩을 원한다면 이 작품을 읽지 마라.
그저 지금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만 있을 뿐이다.
그게 현실이고 최선 아닌가?
생뚱맞은 표지 외에는 아쉬움이 없었던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