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산문집에 실린 글 상당수는 구면이다.
나는 작가가 국민일보에 연재했던 이 책의 프로토타입을 인상 깊게 읽었다.
글이 모이면 단행본으로 엮이겠구나 싶었는데, 역시나 그렇게 됐다.
콜센터에서 힘겹게 일하다가 신춘문예 당선 연락을 받은 순간.
개인파산과 개인회생 때문에 흩어졌던 가족과 재회한 놀이공원.
셀프빨래방에 남긴 메모에 댓글로 달린 메모.
앓아누운 작가에게 시루떡을 가져다주는 고시원 옆방 언니.
손톱에 봉숭아 꽃잎 물을 들이는 할머니.
명절에도 가게 문을 열고 고향에 가지 못하는 손님을 기다리는 분식집 아줌마,
나는 작가의 글을 읽으며 마치 밥냄새를 풍기는 오래된 골목을 걷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순서와 상관없이 아무 페이지나 펼쳐 읽어도 상관없지만, 가능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일독하는 게 좋다.
이 산문집은 제목처럼 계절 순서대로 글을 엮었고, 봄-여름-가을-겨울-다시 봄으로 이어지는 계절감이 살아있다.
매년 계절이 돌아오듯 잔잔하게 흘러가는 일상이 삶을 버티게 해주는 힘이었음을 새삼 깨닫게 해주는 글의 연속이다.
작가가 거쳐온 삶 중에 나와 겹치는 부분(특히 열악한 주거환경)도 꽤 있어서 원고지 5매 분량의 짧은 글인데도 몰입하기 쉬웠다.
가난이 글의 주된 소재이지만, 이를 표현하는 방식이 가난하지 않다는 점이 이 책의 힘이다.
부드러워 보이지만 단단하다.
소설 쓰기는 철저히 혼자 하는 작업이다.
사실 이런 형태의 작업이 내 성격에 맞긴 하다.
기자로 일했던 시절에 가장 힘들었던 건 누군가에게 수시로 연락하고 만나는 일이었는데, 목구멍이 포도청이어서 철저히 본성을 숨기고 살았다.
요즘 표현으로 I인데 E처럼 살았다고 말하면 적절하려나?
내 낯가림이 엄청나게 심하다는 걸 함께 사는 가족도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알았다.
전화벨 소리만 울려도 가슴이 철렁하고 사람을 만나면 기가 빨리는 터라 숨어 사는 중인데, 기자 시절 경험 덕분에 소설을 쓰고 있으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문제는 그렇게 혼자 있다 보면 잡생각이 많아진다는 거다.
작업이라도 잘 되면 괜찮은데, 그렇지 않으면 불안감이 쌓인다.
하지만 작업이 잘 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럴 때면 자연스럽게 다른 소설가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그런 이유로 이 책을 펼쳤는데, 2023년에 처음 읽는 책으로 좋은 선택이었다.
지나간 일상이 무의미한 시간이 아니라 빌드업의 시간이었다고 어깨를 토닥여주는 것 같아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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