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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후기

이경혜 산문집 <어느 날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보리)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23. 2. 11.



나는 국민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일기를 쓴 일이 (거의) 없다.
내가 일기 쓰기에 흥미를 잃은 이유는 일기가 숙제였기 때문이다.
쓰지 않으면 교사에게 혼나고, 썼어도 교사 마음에 들지 않으면 혼나는 숙제.
돌이켜 보면 그 시절에 내가 겪었던 교사 중엔 인격 파탄자라고 불러도 모자라지 않을 사람이 꽤 많았다.
나는 오늘날 교권이 떨어진 이유 중 하나가 학창 시절에 개차반인 교사를 경험한 학부모들이 많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처음으로 공부에 재미를 느낀 때는 도서관에서 혼자 3수를 준비할 때였다.
학교는 희한하게 재미있는 걸 재미없게 만드는 재주를 가진 공간이었다.

그랬던 내가 일기의 가치를 느끼게 된 계기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일기장 때문이다.
16년 전 나는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일기장을 발견했다.
당시 유품 대부분을 태우거나 버렸는데, 일기장만큼은 차마 버릴 수 없었다.
어머니가 남긴 생생한 흔적이 담겨 있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차마 읽을 용기가 나지 않아 일기장을 오랜 세월 책꽂이에 꽂아둔 채 외면했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 속에서 겨우 빠져나오고 있는데, 그걸 보면 다시 슬픔 속으로 빠져들 것 같아 겁이 났기 때문이다.

제 나이 마흔이 되어서야 겨우 일기장을 펼칠 용기가 났다.
그 속에는 내가 아는 ‘어머니’가 아니라 낯선 ‘여자’가 있었다.
나는 일기장을 통해 19살부터 45살까지의 어머니를 만났다.
이제 돌아가신 어머니의 나이와 가까워진 나는 한 ‘여자’로서의 어머니와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나는 장편소설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를 썼다.
만약 어머니의 일기장을 버렸다면, 그 일기장을 읽지 않았다면, 나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죽을 때까지 오해하며 살았을 테다.

잡설이 길었는데, 이 산문집에 관한 감상으로는 이런 개인적인 이야기가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었다.
작가는 13살부터 지금까지 50년 동안 150권이 넘는 일기장에 꾸준히 일기를 써 왔다.
이 산문집은 작가가 평생 써 온 일기에 관한 이야기다.
작가의 일기도 일부 발췌돼 담겨 있지만, 주된 내용은 작가가 경험한 일기 쓰기의 즐거움이다.
일기 속에서 작가는 온전히 주인공이다.
작가에게 일기장은 펼치면 언제든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는 타임머신이고, 어떤 힘든 상황에서도 나를 나로 살 수 있게 지탱해주는 든든한 친구다.
이 산문집을 읽는 내내 어머니의 일기장이 페이지에 겹쳐 보였다.
어머니에게도 일기장은 그런 존재였던 거다.

완독 후에 나도 일기를 꽤 오래 써왔음을 깨닫게 됐다.
작가에 따르면 아무때나 생각나는 대로 기록하면 그게 일기다.
그렇다면 내가 블로그,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에 오랫동안 끼적여 온 많은 글도 일기인 셈이다.
끼적인 날짜와 시간까지 정확하게 기록돼 있으니 이보다 확실한 일기가 없다.
그곳에 내가 끼적인 글을 시간순으로 살펴보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꽤 많이 변했음을 알았다.

쓰는 데 의무감이나 부담을 가지지 말라고.
매일 써도, 몇 달에 한 번 써도 상관없으니 진실하게만 쓰라고.
진실하게 쓰는 것이 일기의 전부라고.
따뜻하고 감동적인 산문집이었다.
정말 잘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