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 준비 과정이란 게 언제 어디서 내릴지 모른 채 2호선 순환열차를 타고 뱅뱅 도는 일과 비슷하다.
괜찮은 일자리는 적고, 그 일자리를 원하는 사람은 많으니, 전공과 적성을 살리는 취업은 언감생심이다.
꿈과 이상만 좇다간 밥을 굶기 십상이니, 거지꼴을 면하려면 적당히 현실과 타협해야 한다.
여기서 비극이 시작된다.
회사라는 조직은 직원에게서 월급 이상을 빼먹으려고 달려드는데, 직원은 일에서 밥벌이 외엔 의미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니 말이다.
취업 빙하기인데도 매년 신입사원의 1년 내 퇴사율이 점점 높아지는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
10여 년 동안 몇몇 직장을 경험하고 깨달은 사실은, 직종과 규모에 상관없이 직원이라는 존재는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는 부품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과연 대한민국에 직원의 개성과 자율을 반기는 조직이 있는지 의문이다.
대체할 수 없는 직원의 존재는 조직의 갑이라는 지위를 흔들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까지 몸통을 흔드는 꼬리를 곱게 바라보는 조직을 본 일이 없다.
그래.
조직이 갑이라는 걸 인정한다고 치자.
그냥 일만 시키면 마음이 편할 텐데, 일 외에도 신경을 써야 할 일이 지뢰처럼 튀어나온다.
누군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한 쓸데없는 업무 프로세스가 많고, 그런 예쁜 쓰레기를 처리하기 위해 직원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연기를 해야 한다.
아침 일찍 일어나 콩나물시루 같은 버스와 지하철에 몸을 욱여 넣고 출근해 피곤한데, 진상들에 머리를 조아리고 온갖 갑질과 꼰대질을 참아내야 하고, 성과를 내놓으라는 압박은 기본 옵션이다.
직장이라는 조직은 화려한 조명도, 환호하는 관객도 없는 어둡고 살벌한 무대다.
“등장하자마자 퇴장하고 싶은 무대에 선 기분이다."
이 작품을 읽으며 가장 공감한 문장으로, 주인공이 직장에 출근하며 느낀 심정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연극배우가 꿈이었지만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출판사 직원으로 취직한 20대 여성이다.
작가는 대학 시절에 연극에 매달렸던 과거의 주인공과 회사원인 현재의 주인공을 번갈아 보여주며,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는 청춘의 고단한 일상을 핍진하게 그려낸다.
"혹시 CCTV로 우리 회사를 엿본 거 아냐?", "내 뒤를 집요하게 쫓아다니며 기록한 거 아냐?"라는 반응을 보이는 독자가 적지 않을 듯하다.
주인공의 선택은 자신을 회사라는 무대에 오른 배우라고 여기며 버티는 거다.
이렇게 말을 늘어놓으니 우울한 작품 같지만, 작품의 전체적인 톤은 내용과 반대로 따뜻하고 유쾌하다.
원고량이 상당하지만 가독성이 훌륭해 페이지가 술술 넘어가는 재미있는 작품이다.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예측이나 희망대로 이뤄진 게 아무 것도 없었다.
어린 시절 장래희망은 문방구 주인이었고 사춘기 땐 로커를 꿈꿨는데,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졸업 후 전공과 상관없는 기자로 일했고, 급기야 마흔에 퇴사해 소설을 쓰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학창 시절에 적성 검사를 하면 늘 기술자나 농부가 나왔는데, 단 한 번도 검사 결과와 어울리는 밥벌이를 해보진 못했다.
지금까지 결과만 보자면 나는 장래 희망도 전공도 적성도 전혀 못 살린 채 여기까지 온 셈이다.
그래서 그런 걸까.
어느 곳에 속해 있든 내 머릿속엔 늘 딴생각만 가득했다.
공부에 집중해야 할 학창 시절엔 기타를 만졌고, 전공 공부를 해야 할 시간에 다른 전공 과목을 들었고, 기자로 일하던 시절엔 다른 밥벌이는 없나 늘 한눈을 팔았고, 소설을 쓰는 요즘에는 콘텐츠 사업으로 돈을 벌 방법이 없나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있다.
아무튼 지금 나는 삶이 지금과 달라지기를 기다리며 여기저기 영역 표시를 하는 중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가 의미심장하다.
희곡의 두 주인공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고도'라는 이름의 사람을 기다리지만, 그들은 '고도'가 누구이고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다.
베케트 자신도 '고도'가 뭔지 모른다고 말했다지?
그런데도 노벨문학상을 탔다.
삶이란 무언가를 간절하게 기다리는데, 그 무언가의 정체도 모른 채 지나쳐버리는 일상의 연속이 아닐까.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을 최선을 다해 살아내는 게 최선이 아닐까.
'고도'를 찾지 못하고 삶을 마쳐도, 지나간 시간을 후회하지 않도록 말이다.
이 작품의 마지막 장을 넘기며 그런 생각을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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