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년 사이에 읽은 한국 문학 소설집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을 내게 묻는다면, 최정나 작가의 <말 좀 끊지 말아 줄래?>를 첫손으로 꼽겠다.
최 작가의 단편은 마치 소란스러운 술집 옆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쓸데없지만 흥미로운 대화 같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시끄러웠고,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듣기 어려웠는데, 이상하게 끌려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는.
단편보다 장편을 지나치게 편애하는 내게 <말 좀 끊지 말아 줄래?>는 깊은 인상을 준 몇 안 되는 소설집이었다.
신작이 나오길 기다린 작가인데, 반갑게도 소설집이 아닌 장편소설로 돌아왔다.
작가 특유의 맛깔나는 수다가 여전한데, 이야기를 장편으로 확장하니 수다가 매력적인 장광설로 변신한다.
주인공 없이 다양한 인물들이 느닷없이 끼어들어 저마다 자기 이야기를 쏟아내는데, 계통 없이 떠돌던 이야기들이 끊어질 듯 이어지다가 뒤틀린 시공간 속에서 하나로 뭉쳐 거대한 구조물을 형성한다.
마지막에는 마치 거대한 거미줄을 마주한 듯 압도당했다.
이 작품은 기술의 첨단에 있는 '미디어 월'을 기술과 대척점에 놓인 환상을 부각하는 요소로 활용한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미디어 월'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기술로 재현해 영상으로 보여주지만, 영상으로 재현한 상상은 결코 현실로 넘어올 수 없다.
아무리 현실보다 더 현실 같아 보일지라도 말이다.
코엑스 SM타운 외벽에 설치된 대형 LED 스크린 속 파도가 아무리 실감 나도 거리를 적실 수 없듯이.
마찬가지로 현실 또한 '미디어 월' 내부로 넘어갈 수 없다.
SF를 닮은 설정이지만, SF라고 부를 순 없다.
현실을 다루고 있지만, 리얼리즘 소설이라고도 부르기 곤란하다.
작가는 현실과 상상을 뒤섞어 구분할 수 없도록 넘나들다가, 마지막에 이르러 '미디어 월'의 너머에 존재하는 건 벽뿐이라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독자에게 묻는다.
당신이 알고 있는 자신이 정말 자신이 맞는지 확신할 수 있느냐고.
책을 덮을 때 무언가에 깊게 홀렸다가 깨어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대단히 스타일리시한 장편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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