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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후기

장강명 산문집 <아무튼 현수동>(위고)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23. 2. 20.



이 산문집에 등장하는 현수동에는 가상의 공간과 현실에 존재하는 공간이 뒤섞여있다.
작가는 광흥창 일대라는 도화지 위에 붓을 들이댄다.
어떤 공간은 그대로 도화지에 남고, 어떤 공간은 새롭게 그려진다.
그 과정에서 작가는 밥 로스가 그림을 그리며 다양한 썰을 풀듯이 현수동에 살아온 이름 없는 인물들의 삶, 그에 얽힌 다양한 전설(혹은 전설을 향한 태클)과 사건을 따라가며 독자에게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묻는다.
그렇게 작가는 자신이 살고 싶은 동네인 현수동이라는 동네를 만들어 나간다.
현수동은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데 없는, 사랑스러운 공간이다.

내겐 어떤 동네가 현수동을 닮은 공간일까.
이 산문집의 독자라면 자연스럽게 그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나는 대전에서 태어났다.
이후 나는 대학에 진학할 때까지 20년 넘게 대전에서 살았고, 대전에서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했으며, 대전에서 첫 직장을 잡아 2년 남짓 다녔다.
내가 대전에서 보내는 세월을 합치면 26년가량이다. 
내 나이가 현재 만 41살이므로, 인생의 3분의 2는 대전 사람으로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 정도면 대전 토박이라고 불러도 무방하겠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대전을 향한 애착은 별로 없다.
오히려 내게 고향처럼 뭔가 애틋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공간은 고작 4년을 살았던 서울 용산구 후암동이다.
후암동은 서울의 중심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고즈넉했고, 오래된 동네라는 인상을 풍기는 공간이었다.좁은 골목을 통해 동네가 거미줄처럼 이어졌고, 누가 봐도 동네에 오래 살아온 사람들이 그 골목을 오갔다.
계절마다 골목에 늘어선 화분에서 다양한 꽃이 피어났고, 특색 있는 가게가 발길을 붙잡았다.
공교롭게도 두 번째로 다녔던 직장이 후암동으로 사옥을 옮겨, 나는 걸어서 3분 만에 출퇴근하는 호사를 누렸다.
나는 후암동에 살던 시절에 준면 씨를 만나 결혼했고, 신혼집도 후암동에 잡았다.
하루 종일 후암동에서 지내도 심심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후암동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언젠가 돈을 많이 벌어 인서울할 기회가 오면 꼭 다시 살아보고 싶은 그리운 공간이다.

나는 실제 후암동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내 머릿속에 이상적으로 편집된 후암동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2년 전 여름에 입주작가로  프린스호텔에 머물 때 후암동을 찾은 일이 있는데, 내 기억에 미묘하게 다른 공간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후암동을 소재로 그런 내 생각과 경험을 정리해봐야겠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했었다.
그런데 이 산문집이 선수를 쳐서 김이 샜다.
뭐든 먼저 찜하는 놈이 임자다.
아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