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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후기

손병현 소설집 <순천 아랫장 주막집 거시기들>(문학들)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23. 5. 3.



눈치도 일머리도 없는 중년 남자, 초등학생 시절에 그림으로 받은 상이 자랑의 전부인 화가, 평생 제대로 가족을 돌보지 않은 떠돌이, 사업이 망해 도망치듯 도시를 떠나온 남자, 절에 버려져 자라는 아이들, 일자리를 잃고 고시원에서 포커로 소일하는 시간 강사, 원정 성매매를 하다가 코로나 때문에 밥벌이가 막힌 여자...

이 소설집에 등장하는 인물은 하나 같이 어디에도 쉽게 발을 붙이지 못하는 낙오자다.
이들이 겪어 온 세상은 차갑고 가차 없다.
이들에게선 오랫동안 찌든 패배의 냄새가 난다.
하지만 딱히 선량하다는 인상을 주지도 않는다.
오늘 당장 사라져도 아쉬워할 사람 하나 없을 것 같다.
어쩌면 그냥 사라지길 바라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쓸데없이 밥이나 축낸다는 이유로.

이 소설집의 가장 큰 특징은 뚜렷한 지역성이다.
이들을 품어주는 공간은 남도다.
남도는 낯선 이들를 은근슬쩍 받아들이고 가진 것을 츤데레처럼 슬그머니 내준다.
작가는 걸쭉한 지역 방언과 음식 등을 곁들여 남도를 생동하는 공간으로 묘사한다.
'잉여인간' 취급받으며 주변으로 밀려났던 이들은 남도의 품 안에서 다시 일어설 힘을 찾거나 적어도 위안을 얻는다.
영화나 드라마는 물론 소설에서조차 지역성을 찾아보기 어려운 현실 속에서 이 소설집에 담긴 단편은 유니크하다.

조선희 전 씨네21 편집장은 이창동 감독의 영화 속 등장인물들을 가리켜 "다들 주민등록번호와 주소가 정확히 찍힌 주민등록증 하나씩 지갑 안에 넣고 우리 주위에 섞여서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이라고 평가했다.
나는 이 소설집을 읽고 조 전 편집장의 평가를 떠올렸다.
이 소설집에 담긴 단편을 아무 작품이나 영화로 만들면 이창동 감독의 작품과 비슷한 느낌을 주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