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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후기

정세랑 장편소설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문학동네)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23. 12. 19.

 



현재 대한민국에서 활동하는 소설가 중에서 가장 스펙트럼이 넓은 작가를 한 명만 꼽자면 정세랑 작가를 꼽겠다.
<보건교사 안은영> 같은 장르 소설은 물론 <이만큼 가까이> 같은 성장소설, <시선으로부터,>처럼 현대사와 여성 서사를 훌륭하게 엮은 장편소설까지.
특히 <시선으로부터,>는 최근 몇 년 사이에 나온 한국 소설을 통틀어 최고작이라고 생각한다.
한 작가가 어떻게 이렇게 다양한 소재를 자유롭게 다루고 심지어 잘 쓰는지 소설을 쓰는 사람으로서 짜증 날 때가 많다.
물론 질투 섞인 칭찬이다.
다음에는 어떤 작품을 내놓을지 진심으로 기다리는 몇 안 되는 작가인데, 역시 예상치 못한 장르의 소설로 뒤통수를 친다.
역사 추리소설이라니.
그것도 통일신라를 배경으로 다룬.

이 작품은 당나라 유학파 출신인 육두품 가문 남장여자가 신라의 수도 금성으로 돌아와 주변에서 벌어지는 이런저런 사건을 해결하는 수사물이다.
총 네 가지 사건을 해결하는 에피소드를 옴니버스 형식으로 담았다.
여기에 손재주 좋은 백제 출신 유민이 조력자로 등장해 홈즈와 왓슨처럼 콤비로 사건을 해결한다.

정세랑 작가의 작품답게 술술 읽히지만, 기대보다는 아쉬웠다.
배경이 통일신라이긴 하지만, 당대의 습속을 깊게 다루진 않는 편이다.
그 때문에 기존 역사물의 사각지대였던 통일신라를 다뤘다는 장점과 개성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남장여자라는 캐릭터가 주는 특유의 아슬아슬한 매력이 잘 드러나지 않은 점도 아쉬웠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의 행보는 그냥 남성 그 자체여서, 주인공의 성별을 남성으로 바꿔 읽어도 크게 무리가 없을 정도다.
주인공의 비밀을 아는 조력자도 딱히 주인공을 전혀 여자로 보지 않아 '버디물' 같다는 인상이 강하다. 

더 매력적으로 캐릭터를 만들고 이야기를 전개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끝까지 남았지만, 이 작품은 시리즈로 기획돼 2권과 3권도(어쩌면 그 이상도) 출간될 예정이다.
첫술에 배부르랴.
'슬로우 스타터'라고 여기고 다음 권에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기다려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