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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후기

김아나 장편소설 <1990XX>(자음과모음)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23. 12. 24.

 



이 작품은 '백말띠'의 기가 세다는 이유로 여아를 집단으로 낙태했던 1990년을 모티브로 쓴 장편소설이다.
1990년에 대한민국에서 조용하고 광범위한 학살이 일어났으며, 그 학살은 임신한 여성의 의사와 상관없이 이뤄졌다는 서사.
황모과 작가의 장편소설 <우리가 다시 만날 세계>를 떠올리게 하는 서사인데, 표현 방식은 그보다 훨씬 과격하고 강렬하다.
프랭크 밀러와 로버트 로드리게스가 감독한 <Sin City>처럼 스타일리시한 연출도 보이고.

그런데 읽는 내내 불편했다.
불편한 감정의 근원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다가 한 질문에 다다랐다.
과거 여아라는 이유로 타의에 의해 낙태 당했던 태아의 생명과 현재 여성의 자기 결정권에 따라 낙태 당하는 태아의 생명의 무게가 서로 다른가?

이 작품에서 드러나듯 1990년에 타의로 태어나지 못한 여아가 많았으며, 그런 불행한 과거를 기억하고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었다.
이제 여성단체가 나서서 낙태죄 비범죄화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세상이다.
헌법재판소도 형법상 자기낙태죄 조항이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제한하고 있고, 태아의 생명 보호란 공익에만 일방적인 우위를 부여했다며 위헌이라고 판단했다.
'조용한 학살' 당시 낙태 당한 태아는 기억해야 하지만, 여성의 자기 결정권에 따라 낙태 당하는 태아는 기억할 필요가 없는 걸까.
과거에 낙태 당한 생명과 오늘날 낙태 당하는 생명이 똑같은 생명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
여성의 자기 결정권과 태아의 생명 보호를 바라보는 사회적 가치 판단이 바뀌었을 뿐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한국의 신생아 성비는 2000년대 들어 이미 자연 상태 수준을 회복했다.
출생 시 자연적 남녀 성비는 약 105대 100인데, 한국의 경우 지난 2022년 기준 104.7대 100이다.
오히려 자연적 성비보다도 여성 비율이 높아졌다.
그렇다면 불행한 과거는 기억하되, 바뀐 세상에 맞게 서사에 변화구를 던지는 게 옳지 않을까.
<우리가 다시 만날 세계>를 읽을 때 도발적인 소재를 왜 이렇게밖에 못 풀어내는가 싶어 답답했는데 이 작품 또한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