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독서 후기

이혁진 장편소설 <광인>(민음사)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23. 12. 29.

 



이 작품이 2023년에 읽는 마지막 소설이 되지 않을까 싶다.
여러모로 놀라운 소설이다.
작가가 장편소설 <누운 배>로 데뷔했을 때, 이제 한국 문학계에도 이렇게 훌륭한 기업소설이 나오는구나 싶었다.
동명의 드라마로도 제작된 작가의 출세작 <사랑의 이해>를 읽었을 땐 섬세한 연애담과 감정선을 현실과 기막히게 엮어 기업소설의 범위를 넓히는 필력을 보고 감탄했었다.
하지만 나는 작가를 기본적으로 사회파 소설가로 여겨왔기 때문에, 이렇게 대놓고 치명적인 연애소설을 써서 내놓을 줄은 몰랐다.

이 작품은 돈에 미쳐 살아온 남자 '해원', 위스키 제조에 미친 여자 '하진', 음악에 미친 남자 '준연'의 관계를 중심으로 서로를 존경하고 사랑했지만 마침내 미워하고 증오하며 광기로 물들고 파국으로 치닫는 과정을 그린다.
제목처럼 그야말로 미친 사랑의 이야기이고, 때로는 막장 드라마보다 더 자극적인데, 절대 천박하지 않다.
심지어 우아하다는 느낌까지 받았다.
여기에 페이지 처음부터 끝까지 진동하는 위스키 향기까지 일품이다.
그래, 이런 게 바로 어른의 연애소설이지.

읽다 보면 독자는 자연스럽게 주인공 중 누구와 자신이 비슷한지 가늠하게 될 텐데, 나는 '해원'에게 가장 공감했다.
가장 평범해 보였으나 실은 가장 미친 사람인 '해원'.
'해원'의 선택을 용서할 수 없지만, 나는 그와 과연 다르게 행동했을까?
내게 '하진'은 사랑스럽지만 감당할 수 없는 여자이고, '준연' 또한 존경스러우면서도 받아들일 수 없는 친구다.
나는 '하진'처럼 투명하게, '준연'처럼 온전히 누군가를 신뢰하는 게 가능한 사람인가?
나는 그렇게 쿨하지 못해서 '해원'의 편을 들 수밖에 없다.
그가 비록 미친 선택을 했을지라도.

요즘 나오는 장편소설의 두 배 이상 분량(680페이지)인데도 불구하고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150페이지 남짓 되는 분량의 소설도 장편소설로 팔리는 세상에 정면으로 반기를 드는 작품이지만 분량을 잊어버릴 정도로 매혹적이다.
그래, 이런 게 바로 장편소설이지.
올해 읽은 모든 장편소설 중 가장 인상적인 작품이다.
작가 본인도 이 작품을 지금까지 쓴 작품 중 최고작으로 생각하지 않을까?
끝내주는 소설이다.

한편으로 작가에게 묻고 싶다.
도대체 당신은 무슨 사랑을 어떻게 해왔기에 이런 소설을 쓴 거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