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평소에 관심이 있었어도 남들이 관심을 가지면 바로 흥미를 잃어버리는 청개구리다.
일례로 나는 2010년대 중반부터 마라샹궈를 직접 요리해 먹을 정도로 마라를 즐겼는데, 몇 년 사이에 마라 열풍이 불면서 흥미를 잃었다.
책도 마찬가지여서 베스트셀러는 어지간해선 구입하지 않고, 구입하더라도 잘 읽지 않는다.
정지아 작가의 장편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 최은영 작가의 소설집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김연수 작가의 소설집 <이토록 평범한 미래> 등이 사놓고도 읽지 않은 대표작이다.
이런 심보로 정세랑 작가의 장편소설 <시선으로부터,>를 뒤늦게 읽었다가 크게 후회했었지.
아무튼 심술 맞은 내게 지난해 베스트셀러로 큰 화제를 모았던 이 산문집이 손에 잡힐 리가 없었다.
지난해 내내 서재에 방치돼 있었다.
지난해 가족이 세상을 떠나고, 장례식장에 들를 일이 많아서였을까.
최근에 이상하게 제목이 뜬금없이 마음에 박혀 2024년에 처음 읽을 책으로 이 산문집을 선택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말 좋았다.
그저 인생의 황혼을 바라보는 배우의 회고만을 담은 책이 아니었다.
자신의 한계를 알고 이를 극복하고자 치열하게 고민하는 삶의 자세가 곳곳에서 드러나는데, 억지스러운 내용이 하나도 없다.
내용이 진심이란 게 느껴져 페이지 넘기기를 멈추고 눈물을 훔치는 일도 몇 차례 있었다.
읽는 내내 저자 특유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해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특히 배우로서, 인간으로서 자존감을 드러내는 모습은 감동을 넘어서 충격적이었다.
나는 저자가 문민정부 시절에 청와대 행사에 초대받았을 때 일화를 읽고 찐으로 감탄했다.
저자는 행사 전 정원 벤치에 앉아서 쉬고 있다가 직원으로부터 제지당했다.
영부인이 앉는 자리니까 일어나라고.
나라면 "어이쿠! 무례를 범해 죄송합니다!"하고 일어났을 텐데 저자의 대응은 놀라웠다.
“미안합니다만, 영부인께서도 배우 김혜자가 앉아 쉬었다고 말씀드리면 기뻐하실 거예요”라며 생글생글 웃다니...
얼마나 내면이 단단하고 자부심이 강해야 이런 반응을 자연스럽게 보일 수 있는 걸까.
그릇이 작은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저자처럼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하진 못할 것 같다.
그런 나조차도 아름답게 산다는 건 무엇일까 잠시나마 고민할 기회를 준 산문집이었다.
그야말로 '혜자스러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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