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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해나 소설집 『혼모노』(창비) 지난해 봄에 산 책을 이제야 읽었다. 2025년 한국 문학에서 최고의 화제작이었는데도 이상하게 손이 가질 않았다. 너도나도 읽으니 유행에 편승하고 싶지 않은 청개구리 같은 심리 때문이었다.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해가 바뀐 요즘에도 이 책은 여전히 베스트셀러이고 앞으로도 당분간 그 위치에서 내려올 일은 없어 보인다. 그래서 펼쳤다. 내가 장편소설을 선호하는 이유는 재미 때문이다. 단편으로만 채워진 소설집을 읽고 "잘 썼네"라는 기분은 많이 느껴봤지만, "재미있네"라는 기분을 느껴본 적은 드물다. 단편을 그리 선호하지도 않는 편이기도 하고. 이 소설집은 잘 썼을 뿐만 아니라 대단히 재미있었다. 소재도 매우 다채롭고 가독성까지 좋은데 얄팍하지 않았다. 한국 문학에 으레 등장하는 소재(페미, 퀴어 등)가 전면에.. 2026. 1. 21.
조예은 소설집 『치즈 이야기』(문학동네) 20년 전쯤의 일이다. 대형마트에서 호기심에 이끌려 고르곤졸라 치즈를 샀다. 『맛의 달인』 『아빠는 요리사』 등 음식 만화에 빠져 있던 시절이어서, 돈은 없어도 낯선 식재료에 많은 관심을 보였던 시절이었다. 고시원에서 처음 맛본 고르곤졸라의 맛은... 썼다. 다른 치즈보다 꽤 비싼 편이어서 기대했는데 크게 실망했다. 고르곤졸라 피자가 맛있다는 소문은 헛소문이었다는 말인가... 비싼 물건이어서 차마 버리진 못하고 냉장고에 방치했다. 출출했던 어느 날, 문득 남은 고르곤졸라로 야마 고르곤졸라 피자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네 슈퍼에서 만두피를 사 온 뒤 그 위에 고르곤졸라를 조금 올리고 전자레인지로 데워봤다. 고시원 주방에 고릿고릿한 냄새가 퍼졌다. 조리를 마친 야매 고르곤졸라 피자의 맛.. 2026. 1. 19.
손원평 장편소설 『젊음의 나라』(다즐링) 작가의 전작인 『튜브』를 읽고 고개를 갸우뚱했던 터라, 이 작품을 사다 놓은 지 꽤 됐는데도 펼치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 새해 첫날에 사다 놓고 아직 읽지 않은 책을 뒤적거리다가 이 작품을 펼쳤다. 첫 목차가 1월, 마지막 목차가 12월이란 점이 눈에 띄었다. 1월 1일부터 일기장 형식으로 구성된 작품의 형식이 흥미로워 페이지를 넘기다 보니, 올해 처음으로 완독한 책이 됐다. 무섭고 잔인한 장면은 하나도 없는데 섬뜩했다. 고령화와 저출생 때문에 활력을 잃은 대한민국 사회의 풍경, 급격한 기술의 진보에 따른 AI의 일상화, 노인을 향한 극단적인 혐오, 다문화 가정을 향한 차별, 존엄사 등 현재 벌어지고 있고 앞으로 벌어질지 모를 온갖 사회 문제의 종합 선물 세트다. 그중에서도 이 작품이 가장 아프게 파고.. 2026. 1. 6.
김홍 장편소설 『말뚝들』(한겨레출판) 시도해 보진 않았지만, 전국의 희석식 소주를 모아놓고 블라인드 테스트를 하면 보해 '잎새주' 하나는 맞출 수 있을 것 같다. 위스키로 테스트하면 다른 건 몰라도 피트 위스키는 걸러내 '탈리스커' 아니냐고 아는 척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만약 소설로 테스트한다면 어떨까? 여성 작가 중에선 아리까리하지만 최정나 작가를, 남성 작가 중에선 확실하게 김홍 작가를 걸러낼 수 있을 것 같다. 이 작품의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김홍은 김홍'이라고 감탄했다. 작품의 소재는 사람이 죽어서 바다에 꽂혀 있는 말뚝인데, 왜 말뚝이고 왜 거기에 꽂혀 있는지 아무도 모르고 설명도 없다. 느닷없이 말뚝들이 바다에서 나와 거리에 등장하고, 광장에 등장하고, 회사에 등장하고, 주인공의 집에도 등장하는데, 말뚝을 목격한 사람들은 하.. 2025. 12. 31.
2025년 12월 5주차 추천 앨범 ▶서울 전자 음악단 [Anthology 1] ▶하임 [FLOW FORM] ▶검엑스 [SLAPS] 2025. 12. 28.
강화길 장편소설 『치유의 빛』(은행나무) 많은 인물과 많은 이야기가 어지럽게 뒤엉켜 있어 따라가기 어려웠다. 작가의 생각을 알고 싶어 수시로 지나간 페이지를 살피다가 포기했다. 이야기보다는 이미지가 강렬하게 남았다. 몸으로 겪는 고통과 수치심은 누구와도 나눌 수 없으며,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감. 고통의 원인을 찾아내면 고통, 수치심, 절망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걸까. 제목의 뉘앙스와 달리 이 작품 속 주인공들은 딱히 치유받지 못한 것 같다. '해리'가 '지수'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사람들은…… 다…… 자기만 아프다고 생각해."(368p)라는 말이 이 작품을 잘 요약한 한 줄 아닌가 싶다. 읽는 내내 불편했다. 2025. 12. 24.
2025년 12월 4주차 추천 앨범 ▶솔루션스 [우화] ▶강허달림 [강허달림 20th] ▶전자양 [합주와 생활] * 살짝 추천 앨범 ▶이윤주 [선명해진 일기장] ▶카더가든 [Blue Heart] ▶낚싯대와 곰방대 [호랑이와 곶감] 2025. 12. 21.
이묵돌 장편소설 『초월』(김영사) 몇 년 전, 이묵돌 작가의 장편소설 『어떤 사랑의 확률』을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 하이퍼 리얼리즘 로맨스라고 불러야 할까. 다크 초콜릿 같은 질감의 시니컬한 이야기가 마음에 들었다. 그 기억 때문에 지난 여름 이 작품을 샀는데, 이제야 읽었다. 어지간한 장편소설 2권 이상의 분량(700페이지가 넘는다)의 압박도 있었지만, 무언가를 쓸 땐 무언가를 읽지 못하는 비효율적이고 부족한 내 역량 탓이다. 전반부와 후반부의 감상을 나눠야겠다. 전반부를 읽을 때는 "걸작이 나왔구나!"하며 흥분했다. 읽는 동안 다른 인생을 몇 차례나 살아보는 듯한 그야말로 '초월적인' 기분을 느꼈다. 오래전에 보고 꽤 충격을 받았던 만화 「5억 년 버튼」이 떠오르는 순간도 있었고, 신경정신과 의사 김영우가 한 청년을 진료하며 관찰한 .. 2025. 12. 15.
정아은 추모소설집 『엔딩은 있는가요』(마름모) 책을 덮은 뒤 가장 먼저 든 감정은 후회였다. 나는 인간관계에 있어서 굉장히 소심하다. 아무리 친하고 잘 아는 사람이어도 먼저 누군가에게 안부를 묻거나 만나자고 연락하는 일이 드물다 그렇다고 그 사람을 그리워하지 않거나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서로 연락을 오래 나누지 않았지만 매일 떠올리는 사람도 적지 않다. 같이 사는 가족도 내 이런 성격을 한참 후에야 알아챘다. 누가 먼저 부르면 거절 없이 잘 나가서 만나고 잘 어울리는 편이니까. 잘 사회화된 극단적인 내향인이라는 표현이 적당하겠다. 나는 정아은 작가님의 부고를 들었을 때 망설이다가 빈소를 찾지 않고 부조금만 보냈다. 작가님의 작품 몇 개를 읽었다는 것 외에는 딱히 인연의 끈이 없는 내가 빈소에 들르면 "이 사람은 누군데 여길 찾아왔지?"라고 생.. 2025. 12.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