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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후기

월급사실주의 앤솔러지 <인성에 비해 잘 풀린 사람>(문학동네)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24. 5. 4.

 



일단 제목이 정말 죽인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읽은 한국 문학 단행본 제목 중에서 이보다 내 눈길을 확 사로잡은 제목은 없었다.
월급쟁이 생활을 해 본 사람이라면, 서점 매대에 놓인 이 책을 그냥 지나치기 어려울 테다.
제목 같은 사람을 조직에서 만나 뒷목을 잡아 본 경험이 다들 한 번쯤은 있었을 테니 말이다.

이 책은 월급사실주의 동인의 두 번째 앤솔러지다.
지난해에 출간된 첫 번째 앤솔러지 <귀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가 많은 주목을 받았기 때문에, 두 번째 앤솔러지에는 어떤 작가가 참여해 어떤 작품을 선보일지 기대가 많았다.
첫 번째 앤솔러지는 전반적으로 내용이 무거웠고, 참여 작가도 많아(11명) 책도 무거운 편이었다.
그래서 두 번째 앤솔러지는 그보다 조금 가볍게 나오기를 기대했다.
다행히 기대한 대로 첫 번째 앤솔러지에서 느껴졌던 비장함이 줄어들었고, 참여 작가 수도 살짝 줄었다(8명).
덕분에 독자로서 읽는 재미는 더해졌다.

두 번째 앤솔러지 역시 첫 번째 앤솔러지처럼 저마다 다른 형태의 절박한 상황에 놓인 다양한 직업군의 현실과 애환을 실감 나게 보여준다.
겉으로는 화려해 보이지만 불안정하기 짝이 없는 프리랜서 아나운서(오늘도 활기찬 아침입니다), 가맹점주의 이익보다 본사의 이익을 우선해야 하는 프랜차이즈 업체 영업부 직원(인성에 비해 잘 풀린 사람), 풀어서 전달한 내용이 자신의 의도와 다르게 쓰이는 걸 보고 혼란스러워하는 프리랜서 통역사(쓸모 있는 삶)의 일상은 소설이 아니었다면 모르고 지나쳤을 밥벌이의 풍경이다.

남의 돈 벌기가 제일 어렵다는 말처럼 곳곳에서 살풍경을 보여주기도 한다.
혐오와 차별을 역으로 사업에 이용하는 현실 앞에서 탄식하는 모습과(식물성 관상), 억울하게 전 직장에서 해고됐는데 또다시 억울한 일에 휘말려 일자리를 잃을 위기에 놓인 상황(등대) 등을 보여주면서 말이다.

소설이 내 안의 어둠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 뜨끔해질 때도 있다.
화려해 보이는 유명인의 삶이 실은 텅 비어있는 걸 보며 씁쓸해하는 모습을(두 친구), 부모가 제때 돈을 내지 않는데 자꾸 찾아오는 제자를 미워 하는 모습을(피아노), 지나친 우월감 속에 열등감이 숨어있는 모습을 보면 말이다(빌런).

첫 번째 앤솔러지가 그랬듯이 이번 앤솔러지 역시 할리우드 히어로물 같은 대단한 스케일의 이야기는 없다.
특별한 교훈을 전하지도 않는다.
그저 우리 주위에서 충분히 벌어질 법한 이야기를 들려줄 뿐이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며 빈정대는 사람도 있겠지만,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온갖 오해와 미움을 살펴보라.
대부분 상대방을 잘 몰라서 오해하고 미워한다.
적어도 이 책을 읽은 사람은 남의 밥벌이를 존중까진 하지 못해도 '누칼협' 운운하며 빈정대진 못할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