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은 94학번 동기 셋이 오랜만에 함께 모여 떠난 여행지인 강릉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등장인물의 심리를 섬세하게 따라간다.
누군가는 20대 중반에 결혼해 장성한 두 아들을 뒀지만 마음은 공허하고, 누군가는 가정이 화목해 보이지만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손에 물이 마를 날이 없고, 누군가는 화려한 싱글처럼 보이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어머니 간병에 시달리고 있다.
대학 동기 사이가 대개 그렇듯이 셋의 사이는 뜨뜻미지근한 편이고, 서로의 속사정에 대해서도 자세히는 모른다.
이 같은 등장인물 사이의 적당한 거리감은 작품이 끝날 때까지 긴장감을 유지하며 서사를 끌어가는 동력이 된다.
마흔아홉 살은 젊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늙었다고 말하기는 애매한 나이다.
등장인물의 나이가 나이인 만큼 산전수전을 다 겪어봤을 테니 솔직할 거라고 예상은 했는데, 예상보다 훨씬 솔직한 이야기들이 오고가서 민망하면서도 흥미로웠다.
셋은 오래전에 함께 여행했지만 공유하지 못한 기억을 남겨둔 강릉에서 다시 만나 서로의 심연을 들여다보며 이해하는 시간을 가지고 다시 각자의 위치로 돌아간다.
아마도 셋이 다시 만나 함께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일은 없을 테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됐는데, 서로에게 너무 많이 보여줬다.
그래도 언제든지 서로에게 전화 정도는 걸어 안부를 묻고 고민을 토로할 수 있는 사이임을 확인했다.
20대 청춘도 아니고 그 정도가 딱 적당하다.
작품을 읽는 내내 모르는 누님들의 여행을 몰래 따라다니며 흥신소 직원이라도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내가 지금 겪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 겪게 될 미래를 미리 엿봤다.
쌉싸름한 카카오 99% 다크 초콜릿을 녹여 먹은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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