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두절미하고 재미있다.
동시에 무척 씁쓸하다.
그리고 미세하게 통쾌하다.
장류진 작가의 소설에서 씁쓸함의 농도를 확 끌어올리면 이런 결과물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책을 덮으니 드림카카오 82% 한 통을 입안에 털어놓고 우적우적 씹어먹은 듯한 기분이 든다.
상당히 독한 하이퍼리얼리즘 소설의 모음이다.
이 소설집에는 자만, 착각, 상심, 오만, 기대, 망각이라는 주제로 쓴 여섯 단편이 실려 있다.
마치 가톨릭이 규정하는 칠죄종(교만, 인색, 질투, 분노, 색욕, 탐욕, 나태)을 연상케 하는 콘셉트다.
단편마다 주제는 달라도 어떤 형태로든 일하는 사람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점은 같다.
직장 생활을 오래 해 봤거나 관련 직종에 관해 상세하게 취재한 작가가 아니면 쓸 수 없는 디테일이 가득하다.
자만으로 가득한 꼰대를 취재하는 기자를 그린 「이달의 인물」을 읽으면서 나도 다시 기자 시절로 돌아간 듯한 착각을 느꼈다.
실제로 나는 이와 비슷한 일을 경험했고 소설을 읽으며 당시의 불쾌했던 감정을 생생하게 떠올렸다(여담인데 나중에 그 취재원은 나락 갔다).
주인공 심리와 주변 상황 묘사도 훌륭하다.
착각을 주제로 다룬 「폭력적인 호의」는 회사에서 상하 관계와 지위가 끼어든 고백 공격을 받은 주인공의 멘붕 심리를 상세하게 묘사해 읽는 내내 분통을 터트리게 한다.
상심을 주제로 다룬 「진로발달이론의 재해석」과 기대를 주제로 다룬 「불필요한 만남」는 어떤 형태로 조직이 청년 세대를 착취하는지 실감 나게 보여준다.
오만을 주제로 다룬 「물류센터에 있던 그 생수는 어디로」처럼 나름 사이다처럼 보이는 복수를 보여주는 주인공도 있는데, 그게 과연 정말 사이다일까.
읽는 내내 마음속에 수시로 파도가 쳤다.
소설이 대개 그러하듯 읽는다고 현실의 문제가 해결되진 않는다.
그저 지금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고 있음을 다각도로 보여줄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종종 본인도 몰랐던 문제가 무엇이고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소설이 알려줄 때도 있으니까.
덤으로 나만 구질구질하게 살아가고 있지 않음을 알면 괜히 위안이 되지 않던가.
이 소설집의 제목을 수록 작품에서 따오지 않고 따로 지은 이유를 알겠다.
도망치고 싶을 때 읽으면 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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