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로 만든 기억과 정신을 온라인 세계로 옮겨 육신 없이 영생하는 세상.
여러 드라마, 영화, 소설 등에 쓰인 매력적인 소재다.
나 역시 「시간을 되돌리면」이라는 단편소설로 다뤘던 소재이기도 하고.
이 작품은 이 같은 SF소재에 작가의 주특기인 스릴러를 엮은 하이브리드다.
솔직히 뻔하고 흔한 소재다.
뻔하고 흔하다는 건 그만큼 매력적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문제는 어떻게 다루느냐에 달려있다.
작품을 들여다보자.
생전의 모든 기억과 정신을 온전히 유지하면서도 육신으로 느낄 수 있었던 모든 감각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가상 세계 '롤라'의 등장이 임박하고, '롤라' 행 티켓이 유심 형태로 무작위로 뿌려진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뻔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티켓을 찾으려는 자, 거래하려는 자, 빼앗으려는 자들이 물밑에서 발 빠르게 움직이며 아수라장이 벌어질 것이다.
그런데 살아생전의 모든 기억과 정신을 가지고 영생하는 세상이 과연 천국일까?
글쎄, 지루하지 않을까?
그래서 작가는 여기에 변화구를 던진다.
가상 세계에서 그저 영생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다양한 삶을 살 수 있게 만들어 보도록 말이다.
마치 시뮬레이션 게임 「대항해시대」처럼 한 캐릭터로 엔딩을 본 뒤 다른 캐릭터로 플레이하면서 엔딩을 보며 다채롭게 게임을 즐길 수 있게 말이다.
영원한 삶에 다양한 서사를 더하는 구조, 과연 소설가다운 발상이다.
제목과 달리 영원한 천국은 없다는 게 작가의 생각으로 읽힌다.
'롤라' 같은 세상에서 산다고 해도, 인간은 끝까지 자기 욕망을 끌어안고 버티며 괴로워할 존재라고.
인간은 설계된 안락한 삶 속에서도 끝끝내 설계도 밖을 벗어나야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존재라고.
그런 '야성'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요소가 아니냐고 작가는 묻는다.
동시에 우리가 '야성'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는 세상을 살고 있는 게 아니냐고 반문한다.
작가의 생각에 동의한다.
마냥 쉽게 읽히는 작품은 아니다.
전작들과 비교하면 구조가 다소 복잡한 데다, 정신없이 페이지를 넘기다가도 놓친 부분이 있는 것 같아 다시 수십 페이지 전으로 돌아가는 일도 잦았다.
하지만 전작들이 그래왔듯이 이 작품 또한 두껍긴 해도 그 두꺼움을 잊어버릴 만큼 잘 읽히고, 결말이 미칠 듯이 궁금할 정도로 흥미롭다는 건 여전하다.
간만에 거장이 거장답게 쓴 장편소설을 만났다.
리스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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