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잘 모르는 나는 이중섭 하면 그의 비극적인 삶부터 떠올리게 된다.
여러 명작을 남겼으나 당대에 제대로 평가받지 못해 좌절했고, 일본에 두고 온 가족을 그리워하다가 말년에 정신병원을 전전하며 무연고자로 요절한 비운의 천재 화가.
대표작인 '소' 시리즈를 제외하면 이중섭의 다른 작품은 그의 비극적인 삶에 가려진 감이 없지 않다.
이 작품은 바로 이 맹점을 찌른다.
삶이 비극으로 점철된 화가가 과연 여러 명작을 남길 수 있었을까?
작가가 이중섭의 생애에서 주목한 부분은 통영에서 보낸 반년이다.
이중섭은 그 짦았던 시절에 <달과 까마귀> <도원> <흰소> <황소> 등 대표작을 그렸고 통영 곳곳의 모습을 담은 풍경화도 여럿 남겼다.
그 시절이 이중섭이 창작에 집중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평화로운 시절이 아니었을까?
전후 문화예술인들의 이야기를 그린 EBS 드라마 「명동백작」의 무대를 통영으로 옮겨 소설로 읽는 기분을 느꼈다.
통영은 여행은 물론 준면 씨가 드라마 「슈룹」을 촬영 때도 동행해 여러 차례 들른 곳이어서 작품에 몰입하기가 더 쉬웠다.
작품 속에서 충렬사, 세병관, 동피랑, 강구항, 해저터널, 욕지도 등 익숙한 공간이 등장할 때마다 나도 50년대 통영의 어딘가를 함께 경험하는 듯했다.
더불어 활판 인쇄물을 닮은 폰트는 마치 그 시절로 시간여행을 하는 듯한 착각을 느끼게 한다.
이 작품의 매력은 사실과 허구를 재구성하는 사이에 이중섭이 남긴 여러 작품을 절묘하게 엮는다는 점이다.
이 작품의 독자는 <달과 까마귀>를 감상하면 전쟁과 분단 속에서 죽어간 수많은 사람을 되짚게 될 테고, <춤추는 가족>을 감상하면 나체로 춤을 추는 네 가족의 모습 앞에서 미소를 지으며 눈을 붉히게 될 테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그저 그림이구나 하고 넘겼던 이중섭의 작품이 생생하게 다가오고, 그 시절에 붓을 들었던 이중섭의 시간이 눈부시다.
이 작품은 장편소설임과 동시에 이중섭의 그림을 이해하는 가이드이기도 하다.
여기에 유강렬, 유치환, 김춘수 등 통영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당대 예술가들의 모습이 동북 방언과 동남 방언에 실려 생생하게 되살아나 현장감을 더한다.
통영이 '예술의 도시'라는 수식어를 많이 들었지만, 이렇게 많은 예술인이 활동하며 지금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이 작품은 이중섭의 안타까운 죽음까지 다루지는 않는다.
부제인 '이중섭의 화양연화'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예술혼을 불태웠던 시절의 이중섭에 집중할 뿐이다.
그래서 더 강렬하고 아름다웠다.
작품으로 다뤄지지 않은 이중섭의 마지막을 알고 있으니까.
활짝 핀 벚꽃이 아름다워 보이는 이유는 곧 진다는 걸 알기 때문 아니던가.
그림을 그리든, 글을 쓰든, 음악을 만들든 무언가를 창작하는 사람이라면 이 작품이 남다르게 다가오지 않을까 싶다.
자기 삶의 화양연화는 언제였는지, 지나갔는지, 아직 다가오지 않은 건 아닌지 되짚어보게 될 테니까.
부디 내 화양연화는 아직 지나가지 않았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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