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을 울렁이게 만드는 책이 있고, 감정을 차분하게 정리해 주는 책이 있는데, 이 책은 후자에 가까웠다.
오래전 습작 시절에 읽은 작가의 장편에서 느껴졌던 톡톡 튀는 발랄함은 이제 찾아보기 어렵다.
대신 작은 것을 다룰지라도 다각도로 들여다보는 깊은 시선이 있다.
그게 작가의 짬밥인가 보다.
이 소설집에는 일곱 개 단편이 실려 있는데, 이들을 하나로 엮는 키워드는 '밤'이다.
그중 두 편은 동인지와 문예지로 먼저 읽은 구면이어서 반가웠고, 다섯 편은 새로 읽는 단편이어서 반가웠다.
소설집이라는 게 재미있다.
소설집에 실리는 단편은 저마다 작가가 다른 때에 쓴 서로 별 관련 없는 작품인데, 특정 키워드를 매개로 엮이면 마치 완성된 퍼즐 조각처럼 새로운 그림을 보여주니 말이다.
밤은 고요하지만, 예상치 못한 사건과 사고가 자주 일어나고, 숨어서 내밀한 이야기를 하기에도 좋은 시간이다.
누군가에게는 지친 노동에서 겨우 벗어나는 짧은 휴식 시간이고(밤의 벤치), 누군가에게는 조금씩 무너지는 가족 관계를 지켜봐야 하는 괴로운 시간이다(그것으로 충분한 밤).
세상 사는 게 가끔 참 더럽고 치사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갑자기 건강에 이상이 생겨 인생 경로를 수정해야 하고(토요일 밤의 로건), 남부럽지 않게 살다가 친구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할 상황에 놓이기도 한다(지나가는 사람).
정말 하기 싫어 미치겠는데, 오랜만에 전 남편에게 연락해 위자료를 내놓으라고 요구할 일도 생긴다(기다리는 동안).
누구나 한 번쯤 겪을 수 있는 더럽고 치사한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졸음은 찾아오는데, 한숨 자고 일어나면 기분이 조금 나아지지 않던가.
파도로 뛰어들어 몸을 적시면 옷이 젖어 난감해질지라도 잠시나마 후련함을 느낄 수 있고(다른 미래), 치료를 받고 충분히 쉬며 여러 밤을 견디면 몸과 마음도 나아지듯이(밤이 영원할 것처럼) 말이다.
작가는 소설집을 통해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나 보다.
밤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며, 밝음이 어둠을 밀어내듯이 늘 나쁘기만 한 삶은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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