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용은 다르지만, 룰루 밀러의 논픽션 산문집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소설로 읽는 기분이 들었다.
개인의 괴로운 과거가 방대한 시간에 걸친 누군가의 과거, 그리고 실제 역사와 엮여서 다시 개인으로 연결돼 돌아오는 과정이 무척 흥미롭고 감동적이다.
주인공은 창경궁 대온실의 보수공사 백서 작성을 위해 건축사무소에 계약직으로 채용된 여성이다.
공교롭게도 대온실과 가까운 곳에 주인공이 학창 시절에 머물렀던 하숙집이 있는데, 그 하숙집은 주인공에게 지금까지 아픔으로 기억되는 공간이다.
백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주인공의 과거와 일제강점기의 유산인 대온실과 시대의 아픔이 촘촘하게 얽히고, 업무 때문에 다시 그 공간과 엮이면서 세월에 묻어뒀던 기억과 감정과 다시 마주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숨겨졌던 아픈 역사가 다시 쓰이고, 더불어 상처로만 기억되던 주인공의 과거도 조용히 단단하게 재정리된다.
장편소설이 점점 짧아지는 추세를 역행하는 두꺼운 분량, 그 분량을 느끼지 못할 만큼 훌륭한 가독성, 끝까지 독자와 밀당하는 미스테리, 적당히 나쁜 빌런과 적당히 좋은 조력자, 페이지를 넘길수록 강해지는 흡인력과 가슴 뭉클한 결말...
많은 인물이 등장하고 꽤 복잡한 구성인데도 이를 체감할 수 없게 매끄럽게 엮어 놀랐다.
자칫 정치적 대립으로 이어질 수 있는 역사를 다룬 작품인데, 어떤 입장에도 경도되지 않고 아픈 과거와 역사는 누군가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태도가 건강하고 아름다웠다.
쉽게 빨리 쓴 글은 쉽게 빨리 쓴 티가 나고, 오랫동안 곱씹어 쓴 글은 오랫동안 곱씹어 쓴 티가 난다.
작가가 얼마나 오랜시간에 걸쳐 자료를 조사하고 답사하고 이 주제에 관해 고민했는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역작이었다.
사다 놓은 지 반년이 넘은 뒤에야 펼친 걸 많이 후회했을 정도로 감탄한 작품이다.
독자로서도, 소설을 쓰는 작가로서도 많은 자극을 받았다.
그래, 이런 작품이 바로 장편소설다운 장편소설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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