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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후기

정명섭 장편소설 『암행』(텍스티)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25. 6. 22.

 



거두절미하고 재미있는 페이지터너다.
이제 막 결혼한 아내와 가족을 모두 잃은 조선의 엘리트 선비인 주인공.
과거에 급제해 암행어사로 임명됐지만, 이대로 암행을 떠나면 이야기가 진행되겠는가.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말이 괜히 있겠는가.
인생의 3대 불행 중 하나가 '초년 출세'라지 않던가.
주인공은 가장 행복한 날에 살인 누명을 쓰고 죽음보다 더 한 갑갑한 처지에 놓인다.
여기서 끝나면 소설이 아니지.
죽음의 문턱에서 주인공은 기연(을 가장한 필연)을 통해 신비로운 힘을 얻는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지 않은가.
어둠 속에서 헤매야만 하는 주인공은 자신이 얻은 힘으로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해결해 나가며 복수에 한 발짝 다가선다.

『몽테크리스토 백작』 이후 복수극은 다 거기서 거기라지만, 그만큼 읽히는 이야기 구조도 없다.
무엇보다도 주변 풍경 묘사가 생생하고 액션도 실감 난다.
묘사에 필요한 배경 묘사를 위해 여기저기 답사를 많이 다녔겠구나 싶었다.
텍스트라는 표현의 한계를 편집으로 타개하는 시도도 인상적이다.
이야기의 톤이 바뀔 때마다 페이지의 톤도 바뀌는데, 그런 편집이 마치 영화의 CG를 닮았다.
그저 텍스트일 뿐인데 CG로 만든 영상이 눈앞에 자연스럽게 그려지니 말이다.
불만이라면 "이대로 끝이라고?" 싶은 굵고 짧은 마무리 정도다.
정세랑 작가의 '설자은' 시리즈처럼 후속작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면 이렇게 끝내진 않았을 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