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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후기

앤설로지 『내가 이런 데서 일할 사람이 아닌데』(문학동네)

by 소설 쓰는 정진영입니다 2025. 6. 24.

 



월급사실주의의 세 번째 동인지다.
첫 번째, 두 번째 동인지가 그랬듯이 이번에 참여한 작가 모두 새 얼굴이다.
첫 번째 동인지는 분량과 내용이 다소 무거워 한 번에 읽기 버거웠던 반면, 두 번째 동인지는 다소 가벼워지고 읽는 재미도 쏠쏠하게 진화했다.
세 번째 동인지는 두 번째 동인지보다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재미만 놓고 보면 지금까지 나온 월급사실주의의 동인지 중 최고다.
참여 작가 역시 빵빵하다.

그동안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여럿 목격했다.
온라인 게임의 화폐나 아이템을 현금으로 환전해 생계를 유지하는 게이머를 통해 청년 실업 문제마저 도둑맞는 현실을 꼬집고(쌀먹:키보드 농사꾼), 정치적 올바름을 교묘하게 악용하는 해외의 근로 현장을 들여다보며 생각할 거리를 남긴다(올바른 크리스마스).
직업이 밥벌이 차원을 넘어 존재 이유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하다가도(아무 사이), 을이 또 다른 을에게 갑질을 하고(내가 이런 데서 일할 사람이 아닌데), 계약직과 정규직을 나누는 편 가르기가 조직원 사이의 관계를 좀 먹게 하는 광경을 볼 때면(일괄 비일괄), 일하며 존엄성을 지키려는 노력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새삼 아프게 깨닫는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갑작스러운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된 중증장애인을 주인공으로 다룬 「일일업무 보고서」다.
기업의 장애인의무고용할당제를 따르기 위해 채용돼 쓸모없는 업무로 하루를 보내고, 화장실에 혼자 갈 수 없는 처지여서 일부러 적게 먹으며 겨우 버티는데, 가족은 주인공의 사고 보상금을 호시탐탐 노리며 '이기적인 인간'이라고 주인공을 가스라이팅한다.
결말은 그야말로 더러워서(말 그대로 정말 더럽다) 더 서글펐다.

남의 돈 벌기가 제일 어렵고 치사하다지만, 그래도 먹고 사는 문제가 더는 구차하게 느껴지지 않는 세상이 오기를 희망한다.
근데 그런 세상이 쉽게 올 것 같진 않다.
그래서 이런 소설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적어도 이 동인지에 여기 실린 작품을 읽은 사람은, 이 작품 속 주인공이 종사하는 직업을 대하는 태도가 잔인해지진 않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