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을 읽고 흔적을 남길 때면 습관처럼 소설인지, 산문집인지, 시집인지 먼저 책의 성격을 정의하고 시작한다.
이 책은 뭐라고 정의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북리뷰집이라고 불러도, 비평집이라고 불러도 만족스럽지 않다.
그렇다고 산문집이라고 뭉뚱그려 부르기에는 뭔가 이상하다.
서점 홈페이지에는 인문교양서로 분류돼 있으니 그냥 저자 이름 뒤에 '저'(著)라고만 붙이는 게 낫겠다.
저자는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국내 최장수 북팟캐스트 <YG와 JYP의 책걸상>의 진행자 중 한 명이다.
이 책에 인용된 18편의 SF의 제목만으로도 저자 엄청난 독서 편력을 실감했다('함께 읽기' 챕터에 소개된 참고 도서 목록을 보면 더 기가 죽는다).
부끄럽게도 나는 이 책에 인용된 작품 대부분을 읽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도 읽는 데에는 전혀 지장이 없으니 겁먹을 필요는 없다.
심지어 재미도 있고 유익하다.
읽고 나면 읽기 전보다 똑똑해진 듯한 기분이 든다.
이 책에 국내외 여러 저자의 SF를 거울삼아 현재를 읽고, 다가올 미래와 다가올지도 모를 미래를 다각도로 예견하고 질문을 던진다.
SF를 다루지만 이를 통해 다루는 주제는 인문, 과학, 사회학, 역사 등 다채롭다.
예를 들어 AI가 화이트칼라 전문직의 업무를 대체하는 현상이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난 원인이 높은 임금 때문이었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 주목하고(킴 스탠리 로빈슨 『쌀과 소금의 시대』), 불평등 문제를 다루면서 서울 집중화와 지방 소멸 문제를 다루는 식(필립 리브 『모털 엔진』)이다.
당연히 현재 노동시장이 직면한 AI와 일자리 문제(장강명 『저희도 운전 잘합니다』)도 다루는데, 예전에 노동 담당 기자로 일했기에 더 꼼꼼하게 읽었다.
기사를 쓰면서 기술 발전이 새로운 일자리를 늘리긴 하겠지만, 지금 세대는 그 혜택을 누릴 수 없으므로 공허함과 박탈감을 느낄 거라는 결론을 내렸는데, 이 책을 읽으며 그 결론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생겨 씁쓸해졌다.
나는 이 문제가 앞으로 우리 사회를 크게 뒤흔들 거라고 보는데, 정부는 이에 관한 대책을 얼마나 마련했는지 의문이다.
과학전문기자라는 저자의 이력답게 과학을 주제로 현재 세계가 직면한 위기를 살피는 일도 잊지 않는다.
오펜하이머와 핵무기를 언급하며 상대방이 가지지 못한 강력한 무기로 전쟁을 막겠다는 발상이 얼마나 위험한지 꼬집고(조 홀드먼 『영원한 전쟁』), 한국의 중앙 집중도가 높은 전력망이 얼마나 위험에 취약한지(마스 엘스베르크 『블랙아웃』) 보여준다.
백인이 유럽게 등장한 시기가 1만 년도 안 됐다며 피부색 차이에 따른 인종 차별이 얼마나 불합리한지 지적하고(옥타비아 버틀러 『킨』), 현생인류는 네안데르탈인과 호모사피엔스의 잡종이라며 왜 다양성이 왜 중요한지 살피는 대목에선(타카노 가즈아키 『제노사이드』) 스산해진다.
다채로운 주제가 종횡해도 어지럽진 않다.
결국 기술이 세상에 미치는 변화를 돌아보고 그 변화의 파도 속에서 인간이 나아갈 길을 묻는다는 점에서 일관성을 느낄 수 있으니 말이다.
망가진 세계를 신랄하게 까발리면서도, 동시에 더 망가지지 않기를 원하는 간절한 바람이 모든 챕터에서 느껴진다.
문장이 경쾌하게 읽히지만,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그 기술을 만든 존재는 인간이기 때문에 결국 인간을 살펴야 한다는 메시지가 무겁다.
앞서 언급했듯이 인용된 SF를 몰라도 이해하기 전혀 어렵지 않다.
오히려 읽지 못한 SF에 많은 흥미가 생길 테다.
나도 몇 작품은 리스트를 따로 정리해 뒀다.
읽고 나면 읽기 전보다 조금 괜찮은 사람이 된 듯한 착각이 든다.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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