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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후기348

김혜나 중편소설 <그랑주떼>(은행나무) 오래전 학창 시절은 내가 애매한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던 괴로운 시간이었다. 키가 크지도 않았고, 잘 생기지도 않았고, 머리가 딱히 좋은 것도 아니고, 공부를 뛰어나게 잘하지도 않았고, 성격도 내성적이고, 그렇다고 착하지도 않은. 악마는 악마인데 약한 악마? 나이가 들어 내가 애매한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니, 비로소 조금씩 자신에게 너그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순 없지 않은가. 애매한 나를 벗어나기 위한 전략은 틈새시장 찾기였다. 나는 어디서 어떤 일을 하든 경쟁자가 적은 곳에서 괜찮아 보이는 먹을거리를 찾아내려고 애를 썼다. 소설가로 사는 지금도 전략은 비슷해서 늘 아무도 쓰지 않지만 재미있어 보이는 소재를 찾는 데 공을 들인다. 그게 주변인으로 살아온 내가 그나마 생존 .. 2024. 4. 14.
김홍 장편소설 <프라이스 킹!!!>(문학동네) 문장과 이야기에 작가의 지문이 찍혀 있는 듯한 소설을 만나는 일이 가끔 있다. 여러 소설 단행본의 한 페이지를 뜯어와서 어떤 작가의 작품인지 블라인드 테스트를 하면, 다른 작가의 작품은 몰라도 김홍 작가의 작품은 골라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만큼 개성적인 소설을 쓰는 작가다. 마치 이병헌 감독이 연출한 영화나 드라마처럼. 모든 것을 사고파는 장사꾼, 베드로를 모시는 무당, 어떤 선거도 53%의 승률로 승리하게 해주는 성물 등. 이 작품 역시 기상천외한 등장인물과 소재로 페이지를 넘기는 내내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건 팔지 않고, 돈으로 살 수 없는 건 기꺼이 구해주겠다는 장사꾼이라니. 어처구니없는 전개가 실소를 터트리게 하다가도, 언뜻언뜻 엿보이는 함의가 무거워 .. 2024. 4. 14.
차무진 장편소설 <여우의 계절>(요다) 이 작품의 배경은 학창 시절에 놀지만 않았다면 들어봤을 귀주대첩이다. 어지간한 소설 단행본 두 권 분량에 가까운 두께만 보고 읽기를 망설인다면 아쉬운 일이다. 호흡이 대단히 빠르고, 어떤 내용이 펼쳐질지 쉽게 가늠할 수 없어서 페이지를 넘기는 내내 흥미진진하다. 귀주대첩을 다룬 콘텐츠를 통틀어서 가장 파격적인 작품이 아닐까 싶다. '구국의 영웅' 강감찬을 무협지에 등장하는 정사지간(正邪之間)처럼 묘사했다는 자체부터 파격 아닌가. 페이지는 넘기는 내내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심지어 페이지를 덮은 뒤에도 헷갈린다. 여기에 미스터리와 오컬트 요소까지 더해지니 소설이 어떻게 끝날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모두가 아는 인물과 모두가 아는 사건으로 모두가 상상하지 못한 이야기를 펼쳐내는 .. 2024. 4. 6.
김지은 산문집 <태도의 언어>(헤이북스) 인터뷰 기사 중에서 가장 깊이가 없고 읽을거리도 없는 기사는 일간지 인터뷰다. 그렇게 볼품 없는 인터뷰가 나오는 가장 큰 이유는 신문 지면의 한계 때문이다. 일간지 인터뷰 작성은 지면에 싣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 때문에 기자가 욕심을 부려 긴 인터뷰를 쓰고 싶어도 쓸 수가 없다. 또 다른 이유는 기자의 업무 특성 때문이다. 기자는 늘 바쁘고 마감에 시달린다. 오래 기자로 일하다 보면, 기사가 되는 '야마' 뽑기에만 집중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상대방의 감정을 헤아리는 데 무심해진다. 마치 소시오패스처럼 말이다. 내 경험상 기자 중에는 소시오패스 성향인 사람이 꽤 많다. 그렇지 않으면 오래 일하기 어려운 구조이고, 그렇게 일해야 성공하기가 좋다. 그런 태도를 유지하며 살아가면, 마지막에 과연 무엇이.. 2024. 4.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