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독서 후기387

최수진 연작소설 『점거당한 집』(사계절) 소설을 읽는다기보다는 무대에서 펼쳐지는 실험적인 퍼포먼스를 감상하는 기분이 들었다. 형식만 보면 최근에 읽은 모든 작품 중에서 가장 독특하고 파격적이었다. 소설과 미술의 경계뿐만 아니라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경계도 없다. 이 책에 실린 단편소설 세 편은 분명히 허구이지만 마냥 허구라고 볼 수가 없다. 십수 년 뒤에 이 땅에서 벌어지는 원전 사고, 사고 이후 고립된 도시에서 벌어지는 온갖 사건들, 여기에 절묘하게 엮이는 예술 작품과 작가의 삶. 익숙한 서사 구조를 기대하고 읽으면 당황스러울지도 모르겠다. 현장 기록(물론 허구다)을 나열하는 형태로 전개되다가, 인터뷰(역시 허구다)가 튀어나오는데, 소설보다는 르포를 읽는 듯한 기분이 들 때도 있었다. 과거와 현재의 역사과 실존하는 예술 작품을 바탕으로 .. 2024. 9. 7.
김애란 장편소설 『이중 하나는 거짓말』(문학동네) 이 작품은 김애란 작가의 두 번째 장편소설이자 무려 13년 만에 내놓는 새 장편소설이다. 이 작품 역시 작가의 첫 장편소설 『두근두근 내 인생』처럼 10대 청소년을 등장인물로 내세운 성장소설이다.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이중 하나는 거짓말’은 등장인물들의 선생님이 제안한 게임으로, 자신에 관한 다섯 가지 정보를 말하면서 거짓말 하나를 끼워 넣는 게 규칙이다. 등장인물들은 거짓말을 공유하면서 서로를 의심하고 때로는 이해하면서 점점 성숙해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말과 글이라는 게 그렇다. 진실이든 거짓이든 말과 글에는 발화하거나 쓰는 사람이 묻어난다. 감추려 애쓰면 드러나고, 드러내려고 애를 쓰면 감춰진다. 서로의 거짓말이 점점 진실에 가까워지는 모습과 등장인물들의 심리 변화를 그리는 작가의 필치가 간결하면서.. 2024. 9. 3.
차무진 장편소설 『나와 판달마루와 돌고래』(생각학교) 차 작가가 쓴 『여우의 계절』은 올해 들어 읽은 모든 장편소설 중 한 손으로 꼽을 수 있을 만큼 기억에 남는 진중한 작품이다. 그런데 이 작품, 지구를 멸망시키러 온 외계인과 딱히 지구를 지킬 마음은 없는데 지키게 된 소년의 어색한 브로맨스를 다룬다. 해양 오염, 펜데믹, 가족 문제 등 묵직한 소재가 브로맨스와 엮이니 묵직함은 줄어들고 유쾌함이 더해진다. 작가 이름을 가리고 이 작품을 읽는다면 『여우의 계절』을 과 『인더백』을 쓴 작가라고 상상하기 쉽지 않을 테다. 이 작품에서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는 외계인이다. '새우탕 큰사발'에 환장하는 외계인이라니. 앉은 자리에서 '새우탕' 서너 개를 까는 외계인을 본 일이 있는가. 어처구니없긴 한데, 그걸 보는 나도 침을 질질 흘리다가 자정 넘어 '새우탕'에 뜨거.. 2024. 9. 3.
박현욱 장편소설 『원할 때는 가질 수 없고 가지고 나면 원하지 않아』(문학동네) 이 작품이 박현욱 작가가 무려 18년 만에 내놓는 새 장편소설이라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그렇게 긴 세월이 흘렀다는 말인가. 그런데도 여전히 박현욱 작가는 내게 가장 도발적인 질문을 했던 작가로 남아 있다. 데뷔작 『동정 없는 세상』과 최근작(?) 『아내가 결혼했다』만큼 파격적이고 논쟁적이고 이야깃거리가 많았던 장편소설이 또 있었나. 하나같이 통념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는 캐릭터들인데, 반발심이 들다가도 묘하게 설득력이 있어 미워할 수가 없었다. 신간을 확인할 때 박현욱이라는 이름을 정말 오랜만에 발견하고 1초도 고민 없이 장바구니에 넣었다. 이 작품은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 대학 동창 태주와 재하, 재하의 여자친구 명 사이에서 벌어지는 연애담을 그린다. 태주는 재하와 딱히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명에게 .. 2024. 9.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