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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영 장편소설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광화문글방) 테러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는데, 모어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낯선 언어를 모어처럼 말하게 된다면? 이 작품은 이런 기발한 설정을 바탕에 두고 말과 세계의 관계를 탐구하면서 전 세계에 만연한 다양한 혐오를 돌아보게 한다. 이 작품의 중심에는 인도계 미국인 수키 라임즈가 있다. 그녀는 미국 시애틀의 한 쇼핑몰에서 일어난 총기 난사 테러 현장에서 파키스탄 이민자 소년을 구하려다 총상을 입은 뒤 사경을 헤맨다. 수십여 일 만에 의식을 되찾은 그녀는 놀랍게도 모국어인 영어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한국어를 원어민처럼 구사한다. 이 같은 그녀의 증상은 '수키 증후군'으로 불리게 되고, 전 세계 여러 테러 현장 및 분쟁 지역 생존자에게 무작위로 발생한다. 한국어를 잃어버리고 벨리즈 크리올을 말하고, 중국어를 잃어버리고 조.. 2022. 2. 11.
장마리 장편소설 <시베리아의 이방인들>(문학사상) 작품의 주된 배경이 대한민국이 아닌 시베리아라는 사실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대한민국, 아니 집 주변을 벗어나지 못하는 소설이 부지기수인 한국 문학에서 이렇게 광활하고 낯선 공간을 소설로 다루는 시도를 하다니 반가웠다. 이 공간에 북한 출신 젊은 지식인과 벌목 노동자, 대한민국 출신 초보 사업가, 러시아 현지인 등이 서로 얽히고설키며 현실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애를 쓴다. 등장인물 모두 비슷한 또래이지만, 서로 다른 체제를 가진 국가에 속해 있어서 저마다 다른 고민을 짊어지고 있다. 각자의 다른 고민은 각자의 다른 상황과 맞물려 갈등과 위기로 이어진다.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철저한 취재에 바탕을 둔 현장감이다. 시베리아와 한반도의 목재 차이에 관한 설명, 목재 업계의 현실, 시베리아의 벌목 현장.. 2022. 2. 10.
박애진 장편소설 <명월비선가>(아작) 작년 말에 황모과 작가의 소설 를 읽고 우리 역사를 배경으로 쓴 스팀펑크에 관심이 생겼다. 신간을 뒤지다 보니 아작 출판사에서 '조선 스팀펑크 연작선'이라는 기획으로 단행본을 출간하고 있음을 알게 됐다. 이 작품은 '조선 스팀펑크 연작선'의 첫 단행본이다. 엄격한 금욕주의를 내세우면서도 직접 기생을 관리하는 관(官), 여성의 정절을 강조하면서도 첩을 들이는 일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대부, 이 같은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복종이 내면화된 여성들. 작품 속 조선은 모순으로 가득한 세상이다. 이 작품은 기생 명월의 눈으로 신분제 사회의 모순을 섬세한 필체로 짚는다. 증기를 동력으로 활용한다는 설정은 시대적 배경과 묘한 대비를 이루면서, 모순을 선명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장치 역할을 한다. 증기 비행선이 조선의 하늘.. 2022. 2. 6.
조남주 연작소설 <서영동 이야기>(한겨레출판) 이 연작소설의 작가의 말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이 소설들을 쓰는 내내 무척 어렵고 괴롭고 부끄러웠습니다." 책 하드커버를 덮은 뒤 들었던 내 기분도 작가의 말과 같았다. 나 역시 읽는 내내 어렵고 괴롭고 부끄러웠으니 말이다. 이 연작소설은 서울 소재 가상의 동네인 '서영동 동아1차 아파트'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주민과 주변인의 이야기를 다룬 단편 7편을 묶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아파트 단지 가치를 높이기 위해 주민 간 담합을 유도하고, 층간소음 때문에 일상이 무너지고 있지만 상승하는 아파트 가치를 포기할 수 없고, 아파트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지하철 통로를 뚫으려고 수시로 시위를 벌이며 악다구니를 부리고, 단지 가치를 떨어트리지 않으려고 노인요양시설을 반대하고, 아파트.. 2022. 2.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