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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소설84

이경희 소설집 <너의 다정한 우주로부터>(다산책방) 블랙코미디로 시작해 사회 문제 비판을 지나 사랑으로 끝나는,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가진 이야기 모음이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후에 "이것도 좋아할 것 같고 저것도 좋아할 것 같아서 다 준비해봤는데 어때?"라는 질문을 받은 기분이다. 나는 "아주 좋았어!"라고 대답하고 싶다. '살아 있는 조상님들의 밤'은 설날에 가족끼리 모여서 돌려 읽기에 딱 좋은 단편이 아닐까? 근래 읽은 단편 중 가장 웃긴 단편이었는데, 꼰대의 끝이 어디인지 펼쳐내는 상상력이 유쾌하다. '신체강탈자의 침과 입'도 읽는 내내 미친놈처럼 키득키득 웃게 한 단편이었다 정말 하찮은 외계인이 등장하는데,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을 닮아 있어 더 웃겼다. 끝까지 진지해 보였던 '바벨의 도서관'을 읽을 때도 마지막에 인공지능이 죽어라.. 2022. 2. 1.
남유하 소설집 <양꼬치의 기쁨>(퍼플레인) 표지를 보고 달콤 살벌한 이야기를 담은 장르 소설이 아닌가 예상했는데, 예상과 달리 달콤을 뺀 살벌한 이야기의 연속이었다. 페이지 곳곳에서 음습한 기운을 느꼈다. 과거에 비슷한 기운을 느꼈던 듯해서 그게 언제인지 생각해보니 이토 준지의 작품을 봤을 때였다. 생활 밀착형 서사에서 밑바닥에 고인 상상력을 끌어내는 집요함이 흥미로웠다. 집요함은 흔들리는 부부 관계, 불륜, 외모지상주의, 함께 사는 시어머니와의 불화, 좀비, 사이코패스 등 익숙한 소재를 익숙하지 않게 변주하는 힘이다. 현실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이라는 모순이 어색하지 않게 동거한다. 읽는 내내 "솔직히 너도 그런 생각 안 해봤어?"라는 질문을 집요하게 받아 뜨끔했다. 질질 끌지 않는 문장과 다음 내용을 굳이 숨기지 않는 돌직구 전개가 읽는 데 경쾌함.. 2022. 1. 31.
해도연 연작소설 <베르티아>(안전가옥) 과거와 미래, 지구와 우주의 중심을 오가는 장엄한 대서사. 읽는 내내 무한한 공간감과 몽환적인 기분을 느꼈다. 그 느낌이 오래전에 올라프 스태플든의 고전 SF 을 읽으며 느낀 경이감과 비슷했다면 과찬이려나. 핑크 플로이드의 걸작 [The Dark Side of The Moon]의 재킷 이미지를 닮은 표지도 마음에 들었다. 실제로 작품 속 이야기의 주된 배경이 달이기도 하고. 작품 속 세 이야기는 네트워크를 통한 확장 현실의 발달이 인류의 미래를 어떤 형태로 이끌어갈지 탐구한다. 이야기 속에서 구현되는 여러 기술은 논리적이면서도 상당히 구체적으로 묘사돼 현실감을 자아낸다. 이야기의 시간과 배경은 달라도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어 연작소설보다는 장편소설 읽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인간의 기억과 의식이 디지털 신.. 2021. 12. 24.
정용준 소설집 <선릉 산책>(문학동네) 반려동물을 잃고, 사고로 자녀를 잃고, 연인을 자살로 떠나보내는 등 이 소설집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무언가를 상실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고민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를 이해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들은 저마다 어딘가를 걷거나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며 아픔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지만 실패한다. '사라지는 것들'의 마지막 부분에 주인공이 남긴 솔직한 고백을 읽으며 무릎을 쳤다. "엄마, 나...... 이제야 뭘 좀 알겠어. 알았는데......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다. 이제 자자. 이상한 소리 그만하고 자자." 작가는 등장인물들을 통해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런데도 살아갈 수밖에 없고, 또 살아지는 게 인생이라고 말이다. 작가의 담담한 태도가 가볍지 않은 위안이 됐.. 2021. 12.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