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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소설84

테드 창 소설집 <숨>(엘리) 다시 읽는데도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재미도 재미지만 품격이 느껴지는 SF다. 작가는 새로운 기술이 변화시킨 세상과 그 세상을 바라보는 인간의 변화를 깊이 있게 탐구한다. 소설마다 다채로운 설정과 전개로 새로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내는데 그 상상력이 대단하다. 책의 문을 여는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부터 비범하다. 마치 ‘아라비안나이트’를 연상케 하는 신비롭고 이국적인 배경에 시간여행이라는 소재를 더하다니. 과거로 돌아가도 미래를 바꾸지 못하며, 그저 과거를 더 잘 알게 될 뿐이란 설정 또한 클리셰를 반복하지 않아 신선하다. 표제작 ‘숨’은 ‘엔트로피’ 개념에 착안해 무분별한 에너지를 사용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는 인간과 인공지능 사이의 유대 관계를 심도 있게 다루며 피할 .. 2021. 9. 27.
손홍규 장편소설 <예언자와 보낸 마지막 하루>(문학사상) 목차부터 의미심장하다. 1895년 4월 24일. 1956년 7월 19일. 2009년 5월 23일. 2014년 4월 16일. 작품을 읽다 보면 첫 번째 날짜는 전봉준의 처형일자, 두 번째 날짜는 박헌영의 처형일자임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 세 번째 날짜와 네 번째 날짜는 굳이 작품을 읽지 않아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날, 세월호 참사가 벌어진 날임을 짐작할 수 있을 테다. 이 작품은 서로 무관해 보이는 사건들을 소설적 상상력으로 엮어냈다 작가는 방대하고도 치밀한 자료 조사 위에 자신만의 통찰을 더해 사건 속 죽음의 의미를 살핀다. 이 작품에서 네 죽음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실패'다 전봉준은 동학농민운동에 실패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고, 박헌영은 북한에서 사회주의혁명에 실패해 숙청됐다. .. 2021. 9. 23.
윤고은 장편소설 <도서관 런웨이>(현대문학) 제목만 보면 SNS 셀럽이나 모델을 다룬 이야기인가 싶다. 처음 부분은 그렇게 오해할 만하다. 그런데 페이지를 더 넘기면 갑작스러운 실종 사건에 보험 이야기가 뒤섞인 제목과 영 딴판인 블랙코미디가 펼쳐진다. 여기서 끝이냐? 마지막에는 로맨스다. 그것도 가슴 아픈 로맨스. 윤고은 작가하면 떠오르는 건 역시 재기발랄한 상상력이다. 불확실한 미래를 다루는 작가의 상상력은 종종 예언이 되기도 했다. 재난 지역 여행상품을 다룬 작품 이 대표적이다. 다크 투어리즘을 한발 앞서 다뤘던 이 작품은 올해 영국 추리작가협회가 주관하는 대거상을 수상하며 화제를 불러일으킨 바 있다. 에서 작가는 결혼 제도를 보험 상품에 포함하는 상상을 설득력 있게 풀어낸다. 작품에 등장하는 '안심결혼보험'은 결혼 준비 비용뿐만 아니라 배우자.. 2021. 9. 13.
장류진 장편소설 <달까지 가자>(창비) 거두절미하고 경쾌하다. 그리고 재미있다. 2017년에서 2018년 사이에 벌어졌던 가상화폐 광풍이 이 작품의 배경이고, 평범한 미혼 여성 직장인 셋의 투자기가 주된 서사의 줄기다. 게다가 장류진 작가는 직장인의 애환을 무겁지 않게 풀어낸 소설집 으로 데뷔와 동시에 문단에서 스타로 떠오른 작가다. 흥미롭지 않을 수가 없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출간과 동시에 베스트셀러를 차지했는데, 가상화폐 광풍이 불 적에 어설프게 뛰어들었다가 몇백만 원을 날린 경험이 있어서 의도적으로 몇 달간 이 작품을 외면해왔다. 그런 경험이 있기 때문에 작품을 읽는 동안 그때 내가 느꼈던 감정이 생생하게 되살아왔다. 덕분에 작품에 빨리, 그리고 깊이 몰입할 수 있었다. 시세가 매초 급변하는데 거래는 24시간 멈추지 않고 이뤄진다. 잠.. 2021. 9.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