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소설141

황정은 연작소설 <연년세세>(창비) 이 작품의 중심에는 한국전쟁 이후 질곡의 현대사를 버티며 살아낸 70대 할머니 '순자'가 있고, 그녀의 딸들이 이야기에 가지를 뻗어 나간다. 얼핏 등장인물만 보면 영화 같은 가족 이야기처럼 보이는데, 책장을 넘길수록 그런 느낌이 사라지고 가슴이 서늘해졌다. 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인물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두는 연출에서 비롯된 효과다. 가족이라는 관계는 이 작품에선 역으로 '개인'에게 관계란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묻는 장치로 쓰인다. 이 같은 연출은 등장인물을 한 발짝 떨어져 바라보게 함으로써,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슬픔과 고통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돌아보게 한다. 담담한 듯하면서도 묵직하고, 때로는 날카롭게 파고드는 문장이 놀라웠다. 사실 나는 이 작품을 사다 놓고 책장에 꽂아둔 뒤 꽤 오래 방치했.. 2021. 7. 9.
조해진 소설집 <환한 숨>(문학과지성사) 조해진 작가의 장편소설 은 내가 문화일보에서 문학 담당 기자로 일했던 기간(고작 10개월이지만)에 기사로 다뤘던 소설 중 가장 감동적으로 읽은 작품이다. 대한민국 사회의 외진 곳과 그곳에 속한 약한 사람들을 다루면서도, 인간을 향한 믿음과 희망을 버리지 않는 작가의 시선이 내게 뭉클한 감동을 줬었다. 작가의 신간을 기다려왔는데, 신간이 출간됐을 때는 내가 새 장편을 집필하던 시기여서 뒤늦게 책을 펼쳤다. 역시나... 좋았다. 작가는 눈앞에 보이지만 손에 닿지 않는 부조리한 풍경을 문장으로 구체화해 독자 앞에 풀어놓는다. 산재로 중태에 빠지거나 죽어갔던 미성년 근로자들, 계약 해지를 앞둔 비정규직, 직장 내에서 서로 싸우는 '을'들, 이유 없이 멸시당하는 장애인, 성범죄를 저지른 후 잠적한 아버지 때문에 .. 2021. 7. 8.
박솔뫼 소설집 <우리의 사람들>(창비) 서사가 소설의 전부까지는 아니어도 7할 이상은 차지한다고 믿는 나로서는, 서사가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 소설이 힘들다. 하지만 그런 소설을 사랑하는 독자도 많기 때문에, 왜 좋은지 느껴보려는 시도는 멈추지 않고 있다. 안타깝지만 이번에도 실패했다. 배수아, 한유주, 정지돈, 오한기 등의 작품을 읽었을 때와 비슷한? 마치 늪에 빠진 기분을 느꼈다. 앞으로도 나는 이들 작가의 세계를 끝까지 이해하지 못한 채로 이해하려는 시도만 되풀이할 것 같다. 2021. 7. 3.
김호연 장편소설 <불편한 편의점>(나무옆의자) 내가 새 장편소설 집필을 위해 횡성 예버덩문학의집에 머무를 때, 짬을 내 읽었던 많은 소설 중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작품은 김호연 작가의 였다. 작가의 신작이 나왔다는 소식이 보여서 예버덩문학의집에서 나가면 바로 읽어야겠다고 다짐했는데, 내 신간 준비 때문에 바빠 독서가 늦어졌다. 이 작품 또한 처럼 '치유계' 소설이다. 이 작품은 서울의 대표적 슬럼가 중 하나인 청파동의 한 편의점을 배경으로 다양한 인물에 얽힌 사연을 따뜻한 시선으로 풀어낸다. 정년퇴임 교사 출신 편의점 사장, 사업자금을 마련하려고 편의점을 노리는 사장의 아들, 성실한 20대 아르바이트생 시현, 야외 테이블에서 혼술로 고단함을 잊는 회사원, 작가 자신을 반영한 캐릭터인 희곡 작가, 그리고 이들 사이를 잇는 미스테리한 노숙자 출신 편의점 .. 2021. 7.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