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46 안윤 소설집 『모린』(문학동네) 몇 년 전 작가의 데뷔작 장편소설 『남겨진 이름들』을 읽고 감탄했었다. 키르기스스탄을 배경으로 현지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한국 소설은 상상해 보지 못했으니 말이다.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깊은 시선과 섬세하면서도 우아한 문장이 인상 깊은 작품이었다. 이 소설집의 분위기는 데뷔작과 다르지만, 일상적인 소재를 일상적이지 않게 다루는 방식이 좋았다. 등장인물의 심리를 묘사하는 문장 역시 데뷔작처럼 섬세하고 우아하다. 장애에 가로막혀 쉽게 소통하기 어려운 마음을 들여다보고(모린), 가장 가까운 사람에 관해 과연 얼마나 아는지 묻기도 하며(핀홀), 오랜 세월 놓지 못한 마음이 끝내 가닿지 못한 채 사라져 버리기도 한다(작은 눈덩이 하나). 소설의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차분한데 그 아래에 깔린 정서는 격정적일 때가 .. 2025. 5. 11. 서유미 소설집 『밤이 영원할 것처럼』(문학동네) 감정을 울렁이게 만드는 책이 있고, 감정을 차분하게 정리해 주는 책이 있는데, 이 책은 후자에 가까웠다. 오래전 습작 시절에 읽은 작가의 장편에서 느껴졌던 톡톡 튀는 발랄함은 이제 찾아보기 어렵다. 대신 작은 것을 다룰지라도 다각도로 들여다보는 깊은 시선이 있다. 그게 작가의 짬밥인가 보다. 이 소설집에는 일곱 개 단편이 실려 있는데, 이들을 하나로 엮는 키워드는 '밤'이다. 그중 두 편은 동인지와 문예지로 먼저 읽은 구면이어서 반가웠고, 다섯 편은 새로 읽는 단편이어서 반가웠다. 소설집이라는 게 재미있다. 소설집에 실리는 단편은 저마다 작가가 다른 때에 쓴 서로 별 관련 없는 작품인데, 특정 키워드를 매개로 엮이면 마치 완성된 퍼즐 조각처럼 새로운 그림을 보여주니 말이다. 밤은 고요하지만, 예상치 못한.. 2024. 9. 15. 조해진 장편소설 『빛과 멜로디』(문학동네) 5년 전에 읽었던 작가의 장편소설 『단순한 진심』은 지금도 내게 감동적인 기억으로 남아있다. 대한민국 사회의 소외된 곳과 그곳에 속한 사람들을 그저 작품 소재로 다루지 않는 사려 깊은 마음이 느껴졌고, 인간을 향한 신뢰와 희망을 잃지 않는 작가의 시선이 따뜻해서 좋았다. 작가는 이번 작품에선 시선을 대한민국 바깥으로 넓힌다. 지금도 분쟁이 끊이지 않는 시리아, 우크라이나, 팔레스타인으로. 그리고 이들 국가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이 향하는 영국으로. 소설로 다루는 공간이 광범위해진 만큼 등장인물들의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는 스케일도 커졌다. 같은 반 아이가 굶을까 봐 돈이 될 것으로 보이는 카메라를 집에서 몰래 가져와 건네는 아이의 간절한 마음이 시작이다. 그 마음이 카메라를 들고 전장을 오가며 끔찍한 현장을 .. 2024. 9. 12. 유은지 장편소설 『귀매』(문학동네) 읽으면서 영화 「파묘」를 보는 기분이 들었다. 「파묘」의 소재는 일본 요괴인 '오니'이고, 이 작품의 소재 역시 요괴의 일종으로 우리에겐 낯선 '귀매'다. 또한 이 작품도 「파묘」처럼 무속 신앙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와 친일파 등을 다루기 때문에 기시감이 많이 들었다. 이 작품은 2002년에 출간된 원작의 개정판이니, 「파묘」가 이 작품을 닮았다고 말하는 게 옳겠다. 이 작품은 우연히(알고 보면 철저한 계획에 따라) 마을 제의 연구를 위해 부산 다대포를 찾았다가 초자연적인 사건에 얽힌 대학생들의 개고생을 그린다. 이 과정에서 일제강점기 당시 다대포에서 벌어진 비극과 누군가의 거대한 탐욕이 드러나고, 이에 따라 마을에 쌓인 원한이 넘쳐흘러 위험수위에 다다른다.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영능력과 문화인류학이라는 전.. 2024. 9. 9. 이전 1 2 3 4 5 ··· 1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