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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34

최정나 장편소설 <월>(문학동네) 최근 몇 년 사이에 읽은 한국 문학 소설집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을 내게 묻는다면, 최정나 작가의 를 첫손으로 꼽겠다. 최 작가의 단편은 마치 소란스러운 술집 옆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쓸데없지만 흥미로운 대화 같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시끄러웠고,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듣기 어려웠는데, 이상하게 끌려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는. 단편보다 장편을 지나치게 편애하는 내게 는 깊은 인상을 준 몇 안 되는 소설집이었다. 신작이 나오길 기다린 작가인데, 반갑게도 소설집이 아닌 장편소설로 돌아왔다. 작가 특유의 맛깔나는 수다가 여전한데, 이야기를 장편으로 확장하니 수다가 매력적인 장광설로 변신한다. 주인공 없이 다양한 인물들이 느닷없이 끼어들어 저마다 자기 이야기를 쏟아내는데, 계통 없이 떠돌던 이야기들이 .. 2023. 2. 19.
정지향 소설집 <토요일의 특별활동>(문학동네) 사놓고 깜빡한 채 읽지 않았던 책을 꺼내 읽었다. 이 소설집에 실린 단편의 주인공은 대부분 예술을 전공한 10대 후반부터 20대 초중반에 걸쳐 있는 여성이고, 위태로워 보이는 연애 이야기가 서사의 주를 이룬다. 20세기 말에 남학교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고 예술과 먼 전공(법학, 컴퓨터공학)을 한 40대 중년 남자인 나는, 멋쩍게 낯선 세계를 몰래 엿본 기분이 들었다. 그 나이대는 성별과 상관 없이 인간적인 호감과 이성으로서의 끌림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지 않던가. 이 소설집은 그 시절에는 몰랐지만, 세월이 흐른 뒤에야 깨닫는 감정을 섬세하게 다룬다. 특히 플러팅과 가스라이팅에 관한 묘사가 상당히 적나라하다. '베이비 그루피' 같은 단편이 그랬다. 몇 년 동안 음악기자로 일하며 홍대 앞을 자주 드나들었고,.. 2023. 2. 18.
안윤 장편소설 <남겨진 이름들>(문학동네) 작가의 이름을 가리고 읽으면 한국 소설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배경은 중앙아시아 지역인 키르기스스탄이고 등장인물은 현지인이다. 이국적인 풍경과 정취가 마지막 페이지까지 이어진다.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이 깊고, 이를 다루는 문장이 섬세하고 우아하다. 보편적인 주제를 다루는데, 이를 표현하는 방식은 낯설어 신선했다. 이런 작품을 쓴 작가가 젊은 작가이고, 심지어 이 작품이 작가의 첫 장편이라니. 많이 놀랐다. 이 작품은 키르기스스탄에서 어학연수를 했던 한국인 '윤'이 현지 하숙집 주인의 부고를 전해 듣고, 그로부터 수양딸의 유품인 공책을 전달받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후 펼쳐지는 이야기는 '윤'이 공책을 한국어로 번역한 내용의 연속인데, 따로 '윤'의 코멘트가 더해지지 않아 읽다 보면 공책의 주인이.. 2023. 2. 7.
정은우 장편소설 <국자전>(문학동네) 제목과 표지로 이 작품에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는지 예상해보자. '국자'라는 단어에 전통적 서사물을 의미하는 '전'(傳)이 붙어있다. 아마도 '국자'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이 주인공이고, 적절한 풍자를 곁들였을 테다. 조리기구 국자와 같은 주인공의 이름, 표지에 실린 젓가락과 접시 이미지를 보니 음식과 깊은 관련이 있는 이야기임이 분명하다. 오른손에 당당히 궐련을 든 여성의 실루엣으로 짐작하건대, '전'으로 불리는 전통적 서사물과 거리가 있는 듯하다. 내 예상대로 모두 들어맞았다. 그래서 실망했느냐고 물어보면 Nope! 안티히어로물(이견이 있겠지만 히어로물은 절대 아니라고 본다)에 따뜻한 가족 서사가 결합하면 어떤 케미가 일어나는지 직접 확인해보시라. 이 작품은 내 예상보다 훨씬 다채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 2022. 10.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