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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35

최양선 장편소설 <세대주 오영선>(사계절) 읽는 내내 내가 주인공이 된 듯 숨이 막혔다. 반지하부터 창 없는 고시원을 전전하던 시절, 홀로 부동산 이곳저곳을 돌며 전세를 알아보던 시절, 전세 보증금 반환을 놓고 집주인과 싸웠던 사건, 하자를 놓고 부동산 중개인과 시비를 벌였던 일 등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이 작품은 대한민국 사회에서 가장 첨예한 이슈인 부동산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장편소설이다. 이 작품은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며 아르바이트를 하는 20대 후반 여성을 중심으로 내 집 마련을 하지 못한 채 IMF 외환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를 거치며 자식에게 가난을 물려준 베이비부머 세대 부모, 열심히 일하며 저축하면 좋은 날이 온다는 부모의 말을 믿은 청년 세대가 겪는 답답한 현실을 정밀하게 들여다본다. 내가 최근에 읽은 소설 중에서 부동산.. 2021. 12. 6.
윤성희 소설집 <날마다 만우절>(문학동네) 지난 여름에 산 소설집인데 이제야 겨우 다 읽었다. 소설집에는 단편 11편이 실려 있는데, 대여섯 편은 이미 문예지나 앤솔로지 등을 통해 접한 작품이었다. 읽지 않은 작품은 정독하고 읽은 작품은 통독한 덕분에, 읽어야겠다고 마음만 먹었다가 자꾸 다른 책에 손을 대는 패턴을 끊을 수 있었다. 작가는 가족이나 주변인으로부터 배신을 당하거나 상처를 받은 이들의 일상과 심리를 작품마다 다양한 형태로 변주한다. 작품 속에 죽음, 질병, 상실 등 온갖 비극적인 상황이 넘쳐나는데 희한하게도 소설집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전혀 어둡지 않다. 오히려 경쾌하고 페이지를 넘기는 내내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특별하지 않은 사건이 특별하게 보이고, 특별한 사건을 특별하지 않게 보인다. 서사 전개에 큰 굴곡이 없고 문장이.. 2021. 11. 8.
박상영 장편소설 <1차원이 되고 싶어>(문학동네) 내가 새 장편소설 집필을 위해 속초에서 한 달 동안 머물고 돌아온 뒤 가장 먼저 펼친 책이다. 박상영 작가는 데뷔 때부터 민감하면서도 무거운 소재인 퀴어 서사를 유쾌하면서도 감각적으로 풀어내며 주목을 받아왔다. 나는 2년 전 문화일보 신춘문예 업무를 맡았을 때 퀴어 서사를 다룬 많은 응모작을 접수하며 작가의 영향력을 실감했다. 그만큼 작가의 첫 장편소설을 향한 기대감이 컸다 작가의 전작이 많은 독자에게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진 이유는, 성소수자의 사랑 속에서 보편적인 사랑의 감정을 끌어내는 과정이 신선하고 설득력 있게 느껴졌기 때문이 아닐까. 이 작품에서도 그런 작가의 장점이 잘 드러난다. 그리고 대단히 재미있다. 작가가 묘사하는 2000년대 초반의 학창시절은 내 경험한 90년대 중후반의 학창시절과 상당히.. 2021. 11. 6.
장은진 장편소설 <날씨와 사랑>(문학동네) 재개발로 철거를 앞둔 오래된 장갑 공장, 그곳에서 가족의 생계를 위해 중노동에 시달리며 청춘을 보낸 여자, 오래전에 가출한 어머니를 찾아 헤매는 아버지, 소싯적에 온갖 사고를 치며 다니다가 이제는 장송곡 같은 노래나 만드는 인디 뮤지션이 된 동생... 배경과 등장인물의 삶은 하나 같이 어둡고 팍팍하지만, 작품에서 느껴지는 온도는 따뜻해 마치 동화 한 편을 읽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작품에서 나오는 온기는 퉁명스럽게 굴면서도 은근히 서로를 챙기는 등장인물 사이의 정에서 비롯된 것일 테다. 이 작품이 동화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맑은 날에도 우산을 쓰고 다니며 공장 앞 광장을 배회하는 이름 모를 남자 때문일 테고. 띠지에 '감성 연애소설'이라는 표현이 보이는데, 연애소설보다는 가족소설이나 성장소설에 더 가깝게.. 2021. 9.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