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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장편소설 <우리의 밤이 시작되는 곳>(나무옆의자) 나는 20대 말에 심한 불면증에 시달렸다. 깊은 밤에 좁은 고시원 방에 홀로 누워 아무런 미래도 보이지 않는 현실을 고민하다 보면 금세 새벽이 왔다. 사나흘 동안 깨어있는 경우도 잦았다. 억지로 잠을 청하려 술을 마셔도 취하기만 할 뿐이었다. 내 선택은 몸을 움직여 지치게 만들기였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나는 고시원에서 1km가량 떨어진 청계천까지 와서 광화문 방향으로 무작정 걸었다. 물길을 따라 황학교, 오간수교, 마전교, 관수교, 수표교, 광교, 광통교를 걷다 보면 어느새 청계광장 뿔탑 앞에 다다랐다. 거기서 잠시 쉬었다가 발길을 돌려 왔던 길을 거슬러 황학교까지 걷고 고시원으로 돌아가거나, 조금 더 걸어서 청계천과 중랑천이 만나는 두물머리까지 걸었다. 그렇게 걷고 고시원으로 돌아오면 언제 불면증.. 2022. 9. 8.
최하나 장편소설 <강남에 집을 샀어>(몽실북스) 사법시험, 행정고시, 7급 공무원 시험, 9급 공무원 시험에 차례로 10년 넘게 매달리다가 30대 중반을 넘겨버린 남자. 뒤늦게 간신히 취업한 직장의 월급 수준은 최저임금이고, 주5일은커녕 주말 근무에 고용주의 사적인 지시까지 받들어야 한다. 번듯하게 사는 동창들과 자신의 처지를 비교하니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 가진 건 아무것도 없지만, 모든 걸 만회하고 떵떵거리며 살고 싶다. 급한 마음에 무리하게 갭투자를 시도하지만, 등기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탓에 근생을 구입해 낭패를 본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라는 생각에 급기야 불법과 합법을 오가는 임대사업에 뛰어든다. 단시간에 강남에 무려 200채 이상의 빌라를 보유한 임대사업자로 변신하며 신분 상승이라도 한 듯한 기분을 느끼지만, 수많은 빌라의 보.. 2022. 9. 7.
장강명 장편소설 <재수사>(은행나무) 이 작품은 장기미제로 남은 20여 년 전 신촌 여대생 살인사건의 진실을 추적하는 과정을 그린다. 제목만 보고 긴장감 넘치는 수사물을 기대하면 곤란하다. 시종일관 차분하고 정적이며 치밀한 작품이다. 대한민국 경찰의 수사 과정을 이보다 현실적으로 자세하게 묘사한 소설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치밀한 취재가 돋보인다. 그런데도 가독성이 매우 훌륭해 읽는 데 막힘이 없고, 그 안에 담긴 메시지도 작가의 데뷔작인 장편소설 이상으로 도발적이다. 분량만 보고 지레 겁낼 필요가 없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읽으며 나는 학부 시절에 형법을 공부할 때 나를 사로잡았던 의문을 다시 떠올렸다. 과연 대한민국의 형사사법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 걸까? 국가는 형벌을 주는 권한을 독점한다. 이를 자력구제 금지의 원칙이라고 부른.. 2022. 9. 6.
정한아 장편소설 <친밀한 이방인>(문학동네) 우리의 삶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일종의 연극과 비슷하지 않을까. 5년 동안 서재에 묵혀 구간이 된 이 작품을 읽고 든 생각이었다. 평생 신분을 속이며 살아온 여자 '이유미'의 행적을 추적하는 주인공의 여정이 작품의 큰 줄기다. 주인공은 결혼 후 출산해 몇 년째 소설을 쓰지 못하는 소설가인데, 우연히 이유미가 자신의 미발표작으로 소설가 행세를 하고 다녔음을 알게 된다. 추적 끝에 드러나는 이유미의 인생사는 기가 막히다. 가짜 대학생이었다가 피아노 학원 강사였고, 대학에서 평생교육원 강사로 일하다가 교수로 임용됐으며, 요양병원 의사 행세도 했었다. 이유미는 결혼도 세 차례 했는데 심지어 이름을 바꾸고 남성 행세를 하며 여자와 산 일도 있었다. 인정 욕구와 그 욕구를 받쳐주지 못하는 가정사가 빚어낸 무리한.. 2022. 5.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