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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추천35

최정나 장편소설 <월>(문학동네) 최근 몇 년 사이에 읽은 한국 문학 소설집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을 내게 묻는다면, 최정나 작가의 를 첫손으로 꼽겠다. 최 작가의 단편은 마치 소란스러운 술집 옆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쓸데없지만 흥미로운 대화 같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시끄러웠고,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듣기 어려웠는데, 이상하게 끌려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는. 단편보다 장편을 지나치게 편애하는 내게 는 깊은 인상을 준 몇 안 되는 소설집이었다. 신작이 나오길 기다린 작가인데, 반갑게도 소설집이 아닌 장편소설로 돌아왔다. 작가 특유의 맛깔나는 수다가 여전한데, 이야기를 장편으로 확장하니 수다가 매력적인 장광설로 변신한다. 주인공 없이 다양한 인물들이 느닷없이 끼어들어 저마다 자기 이야기를 쏟아내는데, 계통 없이 떠돌던 이야기들이 .. 2023. 2. 19.
이경혜 산문집 <어느 날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보리) 나는 국민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일기를 쓴 일이 (거의) 없다. 내가 일기 쓰기에 흥미를 잃은 이유는 일기가 숙제였기 때문이다. 쓰지 않으면 교사에게 혼나고, 썼어도 교사 마음에 들지 않으면 혼나는 숙제. 돌이켜 보면 그 시절에 내가 겪었던 교사 중엔 인격 파탄자라고 불러도 모자라지 않을 사람이 꽤 많았다. 나는 오늘날 교권이 떨어진 이유 중 하나가 학창 시절에 개차반인 교사를 경험한 학부모들이 많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처음으로 공부에 재미를 느낀 때는 도서관에서 혼자 3수를 준비할 때였다. 학교는 희한하게 재미있는 걸 재미없게 만드는 재주를 가진 공간이었다. 그랬던 내가 일기의 가치를 느끼게 된 계기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일기장 때문이다. 16년 전 나는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일기장을 발견했다.. 2023. 2. 11.
이희영 장편소설 <테스터>(허블) 이 작품은 멸종된 동물을 복원했다가 인류에게 치명적인 바이러스까지 함께 복원돼 벌어지는 심각한 사태를 해결하는 과정을 다룬다. 이쯤에서 예상할 수 있듯이, 이 작품은 과학기술의 진보와 발전이 과연 인류에게 옳은 일인지 묻는다. 치밀하게 쌓아 올려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터트리는 반전이 놀라웠다. 정말 많이 놀라서 몇 차례나 반복해 반전 부분을 읽었다. 내가 장담하는데 작가는 이 반전을 쓰며 엄청난 희열을 느꼈을 것이다. 이 작품을 읽고 과학기술의 진보와 발전이 계급 사회를 공고하게 만들고, 사회적 약자는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희생양임을 자각하지 못한 채 불쏘시개로 쓰일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특히 이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 담긴 문장은 마치 묵시록처럼 읽혔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세상이 더 좋.. 2023. 1. 23.
김의경 산문집 <생활이라는 계절>(책나물) 이 산문집에 실린 글 상당수는 구면이다. 나는 작가가 국민일보에 연재했던 이 책의 프로토타입을 인상 깊게 읽었다. 글이 모이면 단행본으로 엮이겠구나 싶었는데, 역시나 그렇게 됐다. 콜센터에서 힘겹게 일하다가 신춘문예 당선 연락을 받은 순간. 개인파산과 개인회생 때문에 흩어졌던 가족과 재회한 놀이공원. 셀프빨래방에 남긴 메모에 댓글로 달린 메모. 앓아누운 작가에게 시루떡을 가져다주는 고시원 옆방 언니. 손톱에 봉숭아 꽃잎 물을 들이는 할머니. 명절에도 가게 문을 열고 고향에 가지 못하는 손님을 기다리는 분식집 아줌마, 나는 작가의 글을 읽으며 마치 밥냄새를 풍기는 오래된 골목을 걷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순서와 상관없이 아무 페이지나 펼쳐 읽어도 상관없지만, 가능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일독하는 게 좋다. 이.. 2023. 1.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