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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35

백가흠 소설집 <같았다>(문학동네) 도둑으로 전업한 대학 강사(훔쳐드립니다), 살인을 저지른 승려(타클라마칸), 다른 남자와 함께 남편을 죽이는 아내(같았다), 소설을 쓰지 않는 소설가(그는 쓰다)... 이 소설집의 등장인물은 모두 난감한 처지에 놓여있고, 동시에 선악을 명확하게 구별할 수 없다. 피해자로 보이는 인물에게는 영악함이 있어 마냥 동정하기가 어렵고, 가해자로 보이는 인물에게는 유약함이 엿보여 대놓고 미워하기가 어렵다. 작가는 인간의 욕망을 다양하게 변주해 드러내 보이는 한편, 우리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윤리적인 생각과 행동을 유지할 수 있는지를 반복해 묻는다. 불편하지만 읽는 내내 끌렸다. 마치 넷플릭스 드라마 을 활자로 읽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뭐 하나 즐겁게 끝나지 않는데도 다음 페이지가 궁금해졌다. 책을 덮을 때쯤에는 .. 2021. 9. 25.
강화길 장편소설 <대불호텔의 유령>(문학동네) 용두사미.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떠오른 단어다. 1부와 2부가 마치 처럼 잘 만든 컬트 무비(이 책의 홍보 문구에서 보이는 호러의 느낌은 별로 없다)의 분위기를 풍겨서 마지막을 기대했는데 아쉬웠다. 마지막 부분인 3부의 내용(그리고 이 작품의 주제로 보이는)은 책 뒤표지에 실린 신형철 문학평론가의 '원한을 이겨내는 사랑의 힘'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런데 역사 속에서 대물림된 깊은 원한의 감정과 불신, 차별과 혐오를 '사랑의 힘'으로 이겨낸다는 결론은 조금 안이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1부와 2부로 촘촘하게 쌓은 이야기의 힘이 마지막에 맥없이 풀렸다면 지나치게 박한 평가인가. 조금 더 밀어붙였다면 좋았을 텐데. 2021. 9. 12.
정한아 소설집 <술과 바닐라>(문학동네) 요즘은 과거보다 못하지만, 초기에 대산대학문학상의 위세는 대단했다. 1회 당선자가 김애란 작가, 2회 당선자가 윤고은 작가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당선과 동시에 등단을 인정받고, 당선작은 계간 창작과비평 지면에 실리니 어지간한 신춘문예나 문예지 신인상 당선보다 권위 있고 실속도 있다. 그러다 보니 전국의 난다 긴다 하는 대학생 문사가 모두 공모를 노렸다. 내가 처음 응모했던 2005년 4회 공모의 소설 부문 당선자가 정한아 작가였다. 그런 인연(?) 때문에 나는 작가의 작품을 등단작부터 대부분을 따라 읽었다. 세월이 흘러 대학생이었던 작가는 나이가 들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됐다. 소설을 읽는 일은 값싸게 간접적으로 다른 인생을 경험해보는 일이다. 작가의 작품을 따라 읽는 과정은 작가의 변화한 삶과 .. 2021. 9. 11.
하라다 히카 소설 <낮술>(문학동네) 지난 5주간 머물렀던 호텔프린스에서 돌아온 뒤 처음 펼친 책이다. 이 책을 펼친 이유는 내년에 출간할 예정인 첫 번째 에세이 때문이다. 에세이에 담을 주제가 술안주여서 자연스럽게 이 책에 마음이 끌렸다. 제목답게 주인공이 술을 마시는 시간은 낮인데, 그 이유는 주인공의 직업 때문이다. 주인공은 이른 나이에 갑작스러운 임신으로 확신이 없는 남자와 얼떨결에 결혼했다가 짧게 살고 이혼한 여자다. 경제력 부족으로 딸을 전남편에게 맡긴 주인공은 친구의 도움을 받아 호구지책으로 '지킴이'라는 일을 한다. 주인공은 야간에 고객에게서 의뢰받은 일을 하는데, 일의 종류는 말동무가 돼주는 일부터 청소까지 다양하다. 퇴근 시간이 낮이다 보니, 하루 일과의 마지막은 귀가 전에 반주를 마시는 일이다. 책은 짧은 에피소드 16개.. 2021. 9.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