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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소설66

박문구 장편소설 <강릉, 겨울 그림자>(북인) 읽는 내내 술 냄새가 진동했던 작품이다. 이 작품의 배경이 강원도의 허름한 바닷가 술집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은퇴 후 노년으로 접어든 주인공이 그의 생을 잘 아는 미스테리한 청년과 예고 없이 술집에서 만나 나누는 대화가 이 작품을 이끄는 물줄기다. 물줄기는 과거에서 현재로 흐르고, 청년은 연대기 순으로 주인공의 생을 흔들었던 사건에 닻을 내린다. 이를 통해 주인공이 생존이라는 핑계로 묻어뒀던 아픈 기억과 시대상이 선명하게 다시 제 모습을 드러낸다. 과거와 직면하는 일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용기를 빌릴 가장 쉬운 방법은 술 아니겠나. 깨어나면 후회하리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이 작품의 전면에 흐르는 정서는 변방의식과 회한이다. 대한민국 인구 절반이 수도권에 거주한다. 수도권 과밀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 2023. 1. 8.
서동원 장편소설 <달 드링크 서점>(문학수첩)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후회했던 순간은 언제였나? 만약 그때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이 작품에 실린 여덟 개의 에피소드가 다양한 형태로 이야기를 변주하며 던지는 질문이다. 이 작품은 처럼 옴니버스 형식으로 생활 밀착형 이야기를 전개한다. 완전한 허구의 장소를 배경으로 다루는 과 달리, 처럼 어딘가에 있을 법한 장소를 배경으로 다뤄 현실감을 높인다는 게 이 작품의 개성이다. 에피소드 전체에 작품을 이끌어가는 두 주인공인 바텐더 '문'과 달 토끼 '보름'의 로맨스가 드러날 듯 말듯 은은하게 깔려 있어 이를 따라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자신의 실수로 벌어진 교통사고로 어머니를 잃은 사람, 성공만 보고 달리다가 연인을 놓친 사람, 밥벌이에 매달리다가 꿈을 잊은 사람 등. 이 작.. 2023. 1. 6.
고호 장편소설 <노비종친회>(델피노) 근엄한 단어인 '종친회'에 전혀 어울려 보이지 않는 '노비'라니. 오로지 제목 하나에 끌려 집어 든 작품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서 읽고 후회하지 않았다. 한국 소설에선 드문 따뜻하고 유쾌한 코미디물이었다. 내용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희성인 헌 씨들이 모여 종친회를 만들고 뿌리를 찾는 이야기'다. 주인공을 비롯해 이 작품에 등장하는 헌 씨들은 소싯적부터 설움을 많이 받아왔다. '현' 씨로 오해받는 일은 기본이고, 조상을 알 수 없어 노비 집안 출신이라는 험담까지 들어왔다. 주인공은 종친회가 나름 돈이 된다는 말을 듣고 곳곳에 흩어진 헌 씨들을 모은다. 그렇게 모인 헌 씨는 몇 안 되지만 출신은 입양아, 탈북자, 주부, 전직 조폭 출신 횟집 사장, 정치인, 교수 등 다양하다. 도무지 공통점이라고는 .. 2022. 10. 7.
정은우 장편소설 <국자전>(문학동네) 제목과 표지로 이 작품에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는지 예상해보자. '국자'라는 단어에 전통적 서사물을 의미하는 '전'(傳)이 붙어있다. 아마도 '국자'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이 주인공이고, 적절한 풍자를 곁들였을 테다. 조리기구 국자와 같은 주인공의 이름, 표지에 실린 젓가락과 접시 이미지를 보니 음식과 깊은 관련이 있는 이야기임이 분명하다. 오른손에 당당히 궐련을 든 여성의 실루엣으로 짐작하건대, '전'으로 불리는 전통적 서사물과 거리가 있는 듯하다. 내 예상대로 모두 들어맞았다. 그래서 실망했느냐고 물어보면 Nope! 안티히어로물(이견이 있겠지만 히어로물은 절대 아니라고 본다)에 따뜻한 가족 서사가 결합하면 어떤 케미가 일어나는지 직접 확인해보시라. 이 작품은 내 예상보다 훨씬 다채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 2022. 10.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