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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소설66

손병현 소설집 <순천 아랫장 주막집 거시기들>(문학들) 눈치도 일머리도 없는 중년 남자, 초등학생 시절에 그림으로 받은 상이 자랑의 전부인 화가, 평생 제대로 가족을 돌보지 않은 떠돌이, 사업이 망해 도망치듯 도시를 떠나온 남자, 절에 버려져 자라는 아이들, 일자리를 잃고 고시원에서 포커로 소일하는 시간 강사, 원정 성매매를 하다가 코로나 때문에 밥벌이가 막힌 여자... 이 소설집에 등장하는 인물은 하나 같이 어디에도 쉽게 발을 붙이지 못하는 낙오자다. 이들이 겪어 온 세상은 차갑고 가차 없다. 이들에게선 오랫동안 찌든 패배의 냄새가 난다. 하지만 딱히 선량하다는 인상을 주지도 않는다. 오늘 당장 사라져도 아쉬워할 사람 하나 없을 것 같다. 어쩌면 그냥 사라지길 바라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쓸데없이 밥이나 축낸다는 이유로. 이 소설집의 가장 큰 특징은 .. 2023. 5. 3.
임국영 소설집 <헤드라이너>(창비) 70~90년대 록과 메탈을 좋아하는 모범생이 소싯적에 해보지 못한 일탈을 B급 감성으로 풀어내 소설로 엮으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싶었다. 대형 록페스티벌에 난입해 소동을 일으키려는 음모를 꾸미는 허세만 가득한 유사 로커들, 술에 취해 자다가 토사물에 질식해 죽은 젊은 남자와 그 일당들, 공원을 전전하며 비둘기 흉내를 내는 소설가 지망생, 훔친 오토바이를 두고 미묘하게 갈등하는 소년들... 이 소설집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적당한 시기에 연애하고 결혼해 아이를 낳고 30평 아파트에 사는 이른바 '평범한 삶'과 거리가 먼 청춘들이다. 그들은 대책 없으며 자기파괴적이면서 유약하고 겁이 많다. 작가는 조금 과장된 모습으로 그들의 삶을 날것의 질감으로 보여준다. 대단한 미래를 꿈꾸지 않는 대책 없는 놈들이 대책 없.. 2023. 4. 29.
염기원 장편소설 <오빠 새끼 잡으러 간다>(문학세계사) 제목 하나만 보고 펀딩까지 참여했던 장편소설이다. 작가의 전작인 를 재미있게 읽기도 했고. 는 한국 문학에서 보기 힘든 디테일을 가진 노동소설이어서 정독했던 작품이었다. 지난 2년 동안 작가가 두문불출하며 장편소설을 여덟 편이나 썼고, 이 작품이 그 첫 작품이라는 소개에 경악했다. 나는 퇴사 후 3년 동안 장편 세 편을 쓰는 일만으로도 완전히 진이 빠졌는데 세상에... 이 작품은 태백과 서울을 배경으로 오빠를 찾아 헤매는 여동생의 행보를 그린다. 주인공은 학창 시절에 투포환선수로 활동하다가 기록에 매달리며 살 수밖에 없는 신세가 싫어 공장에 취직한 노동자다. 아버지는 무책임한 가장의 표본이었고, 어머니는 엉망인 가정을 홀로 건사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책만 읽으며 허송세월하던 오빠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 2023. 4. 27.
최정나 장편소설 <월>(문학동네) 최근 몇 년 사이에 읽은 한국 문학 소설집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을 내게 묻는다면, 최정나 작가의 를 첫손으로 꼽겠다. 최 작가의 단편은 마치 소란스러운 술집 옆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쓸데없지만 흥미로운 대화 같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시끄러웠고,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듣기 어려웠는데, 이상하게 끌려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는. 단편보다 장편을 지나치게 편애하는 내게 는 깊은 인상을 준 몇 안 되는 소설집이었다. 신작이 나오길 기다린 작가인데, 반갑게도 소설집이 아닌 장편소설로 돌아왔다. 작가 특유의 맛깔나는 수다가 여전한데, 이야기를 장편으로 확장하니 수다가 매력적인 장광설로 변신한다. 주인공 없이 다양한 인물들이 느닷없이 끼어들어 저마다 자기 이야기를 쏟아내는데, 계통 없이 떠돌던 이야기들이 .. 2023. 2.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