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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추천35

배명훈 연작소설집 <화성과 나>(래빗홀) 소싯적에 과학자를 꿈꾸며 이나 같은 잡지를 열독했던 시절이 있었다. 과학 잡지답게 우주 탐사를 주제로 다룬 기사와 사진이 많이 실려 있었는데, 지금까지 내 기억에 강렬하게 남아 있는 건 튜브에 담긴 우주식량을 짜 먹는 비행사의 모습이다. 식사하는 비행사의 표정이 딱히 즐거워 보이진 않았지만, 나는 그 맛이 정말 궁금해 미치는 줄 알았다. 지금이야 튜브 안의 내용물이 유동식일 테고, 지구에서 차려 먹는 음식보다 맛이 없다는 걸 충분히 짐작하지만, 어린 시절 내 눈에는 그저 맛있어 보였다. 이젠 단순히 배를 채우기 위해 먹는 음식은 식량보다 사료에 가깝다는 걸 알기에, 비행사들이 당시에 얼마나 고생했을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요즘 우주비행사는 과거보다 음식다운 음식을 먹는 듯하지만, 잘 해봐야 동결건조 .. 2023. 12. 8.
최유안 연작소설 <먼 빛들>(앤드) 최근 들어 한국 문학계에서 보이는 중요한 흐름 중 하나는 일하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소설이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소설이 과거에 없진 않았지만, 최근에 노동을 다루는 소설은 노동 그 자체를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이념을 강조했던 과거 노동 소설과 차이를 보여준다. 나는 현실에 발붙인 서사를 사랑하고 그중에서도 땀 흘리는 소설을 편애한다. 그런데 그런 소설을 읽다 보면 일부 노동 현장이 비어있음을 느낄 때가 많다. 그중 하나는 우리 주변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노동인 막노동이 이뤄지는 현장이다. 이는 나를 포함해 작가 대부분이 막노동을 구체적으로 경험한 일이 드물고, 막노동 현장을 오래 경험한 사람은 자기 경험을 굳이 밝히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평생 막노동을 한 아버지는 내게.. 2023. 11. 23.
청예 장편소설 <라스트 젤리 샷>(허블) 초지능 안드로이드인 '인봇' 삼남매와 이들을 만든 연구자가 윤리 법정에 오른다. 각 인봇의 이름은 '엑스', '데우스', '마키나'.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들의 능력은 신과 비교될 정도로 대단하다. '엑스'는 인간의 노동을 돕는 인봇으로 지금까지 맡았던 모든 임무를 훌륭하게 완수했다. '데우스'는 엄청난 지적 능력을 발휘하는 인봇으로 세상 모든 것을 논리적으로 바라보고 해석하는 데 탁월하다. '마키나'는 인간의 감정을 세밀하게 이해하는 인봇으로 간병에 최적화된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런데 충격적이게도 이들은 모두 인간을 해치고 말았다. 그야말로 완벽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는 세 인봇은 무슨 이유로 그런 선택을 한 걸까? 작품을 읽기 전부터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설정이다. 이 작품의 매력은 완벽에 .. 2023. 11. 20.
나재필 산문집 <나의 막노동 일지>(아를) 30년 가까이 기자로 살아온 중년 남자가 준비 없이 사표를 던졌다. 평기자 시절에는 굵직한 기자상을 많이 받았고, 데스크를 거쳐 '기자의 꽃'이라고 불리는 편집국장 자리에도 앉아봤다. 사실상 떠밀리듯 낸 사표였지만, 살아오면서 나름 콧방귀를 뀌어봤으니 나오면 어떻게든 살아질 줄 알았다. 하지만 세상은 나이 든 청춘에게 관대하지 않았다. 이런저런 일용직 알바와 식당 주방보조를 전전하며 재취업을 시도한 끝에 도착한 곳은 막노동 현장이었다. 막노동은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노동 형태이지만,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한민국 사회가 막노동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기 때문일 테다. 이른바 '노가다'라고 불리는 막노동 현장은 마치 인생 막장인 사람들이 모인 곳.. 2023. 11.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