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소설추천72

이현석 장편소설 <덕다이브>(창비) 이 작품은 발리의 한인 서핑 캠프를 배경으로 병원 내 괴롭힘인 '태움'이라는 무거운 소재를 섬세한 필치로 다룬 장편소설이다. 우선 '덕다이브'라는 단어가 낯설어 의미를 웹서핑으로 찾아봤다. '덕다이브'는 오리가 잠수하듯 수면 아래로 파고들어 타기 어려운 거대한 파도를 피하는 기술을 의미하는 단어였다. 작품을 읽다 보니 소설의 주제와 내용을 훌륭하게 압축한 제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3년 차 서프 강사인 태경과 캠프에 수강생으로 찾아온 인플루언서 민다를 중심으로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며 이야기가 펼쳐진다. 태경은 과거에 한 건강검진센터에서 업무 보조 인력으로 일했고, 민다는 당시 태경과 함께 일했던 간호사였다. 실수가 잦았던 민다는 선배 간호사로부터 태움을 당했고, 태경을 포함한 다른 직원은 태움을 방관하거.. 2022. 9. 10.
정보라 소설집 <여자들의 왕>(아작) 잠에서 깨어난 공주는 칼을 들어 기사를 위협하고, 악당 취급을 받는 용은 알고 보니 꽤 괜찮은 녀석이다. 무슬림은 세간의 인식과 달리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고, 살벌한 권력 투쟁을 벌이는 여성 사이에서 남성은 쩌리가 된다. 남편에게 학대받는 줄 알았던 여인은 실은 그 상황을 즐기는 흡혈귀였고, 적진에 뛰어들어 적을 섬멸하는 지휘관은 공주님이다. 고정관념을 전복하는 상상력이 생각보다 훨씬 흥미진진한 소설집이었다. 초반의 '높은 탑에 공주와' '달빛 아래 기사와' '사랑하는 그대와' 3부작은 읽는 내내 피식피식 웃게 했다. 세 작품은 연작이라고 볼 수 있지만, 사실상 한 작품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 세 작품만 따로 떼어내 경장편으로 선보이고, 애니메이션(실사 영화는 놉!)으로 각색하면 대단히 재미있는 결.. 2022. 9. 9.
고요한 장편소설 <우리의 밤이 시작되는 곳>(나무옆의자) 나는 20대 말에 심한 불면증에 시달렸다. 깊은 밤에 좁은 고시원 방에 홀로 누워 아무런 미래도 보이지 않는 현실을 고민하다 보면 금세 새벽이 왔다. 사나흘 동안 깨어있는 경우도 잦았다. 억지로 잠을 청하려 술을 마셔도 취하기만 할 뿐이었다. 내 선택은 몸을 움직여 지치게 만들기였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나는 고시원에서 1km가량 떨어진 청계천까지 와서 광화문 방향으로 무작정 걸었다. 물길을 따라 황학교, 오간수교, 마전교, 관수교, 수표교, 광교, 광통교를 걷다 보면 어느새 청계광장 뿔탑 앞에 다다랐다. 거기서 잠시 쉬었다가 발길을 돌려 왔던 길을 거슬러 황학교까지 걷고 고시원으로 돌아가거나, 조금 더 걸어서 청계천과 중랑천이 만나는 두물머리까지 걸었다. 그렇게 걷고 고시원으로 돌아오면 언제 불면증.. 2022. 9. 8.
최하나 장편소설 <강남에 집을 샀어>(몽실북스) 사법시험, 행정고시, 7급 공무원 시험, 9급 공무원 시험에 차례로 10년 넘게 매달리다가 30대 중반을 넘겨버린 남자. 뒤늦게 간신히 취업한 직장의 월급 수준은 최저임금이고, 주5일은커녕 주말 근무에 고용주의 사적인 지시까지 받들어야 한다. 번듯하게 사는 동창들과 자신의 처지를 비교하니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 가진 건 아무것도 없지만, 모든 걸 만회하고 떵떵거리며 살고 싶다. 급한 마음에 무리하게 갭투자를 시도하지만, 등기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탓에 근생을 구입해 낭패를 본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라는 생각에 급기야 불법과 합법을 오가는 임대사업에 뛰어든다. 단시간에 강남에 무려 200채 이상의 빌라를 보유한 임대사업자로 변신하며 신분 상승이라도 한 듯한 기분을 느끼지만, 수많은 빌라의 보.. 2022. 9.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