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소설추천72

박지영 장편소설 <고독사 워크숍>(민음사) 제목부터 도발적이다. 고독사는 이제 노년층을 넘어 세대를 가리지 않고 벌어지는 사회적 문제다. 매년 큰 폭으로 늘어나는 청장년층 무연고 시신 비율이 이를 방증한다. 이 주제를 다룬 소설이 이제야 나온 게 오히려 늦은 감이 있다.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제목에서 느껴지는 어두운 첫인상이 서서히 지워진다. 이 작품은 여러 등장인물을 내세워 각자 고독사를 준비하는 과정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그린다. 고독사하면 당연하게 떠올리는 빈곤층 노년이 아니라 젊은 직장인, 학생, 부부 등 우리 주위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읽는 내내 와닿는 부분이 많았다. 이들은 익명의 커뮤니티에 모여 고독사를 준비하는 과정을 서로에게 공유하는데, 그 과정이 참 시시하다. 그 시시한 이야기를 공유하는 행위가.. 2022. 9. 7.
장강명 장편소설 <재수사>(은행나무) 이 작품은 장기미제로 남은 20여 년 전 신촌 여대생 살인사건의 진실을 추적하는 과정을 그린다. 제목만 보고 긴장감 넘치는 수사물을 기대하면 곤란하다. 시종일관 차분하고 정적이며 치밀한 작품이다. 대한민국 경찰의 수사 과정을 이보다 현실적으로 자세하게 묘사한 소설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치밀한 취재가 돋보인다. 그런데도 가독성이 매우 훌륭해 읽는 데 막힘이 없고, 그 안에 담긴 메시지도 작가의 데뷔작인 장편소설 이상으로 도발적이다. 분량만 보고 지레 겁낼 필요가 없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읽으며 나는 학부 시절에 형법을 공부할 때 나를 사로잡았던 의문을 다시 떠올렸다. 과연 대한민국의 형사사법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 걸까? 국가는 형벌을 주는 권한을 독점한다. 이를 자력구제 금지의 원칙이라고 부른.. 2022. 9. 6.
김혜나 장편소설 <차문디 언덕에서 우리는>(은행나무) 이 장편소설을 읽으며 지난 2009년의 봄, 여름, 가을을 떠올렸다. 그 시절은 뜻대로 되는 게 아무것도 없었고, 사랑하는 사람도 모두 내 곁을 떠나가던 20대의 끝물이었다. 그해 봄, 나는 초기 불경인 을 접하고 내 잇단 불운을 조금이나마 이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이성적으로 나를 바라본다고 해도, 내 밑바닥에 단단히 쌓인 감정의 찌꺼기까지 정리하긴 어려웠다. 마음은 의지대로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초여름에 나는 3박 4일 동안 서울에서 고향인 대전까지 걸었다. 감정의 찌꺼기를 정리하고 내 안에 차오르는 무언가를 소설의 형태로 남기고 싶었다. 출간이 보장되지 않는 데다, 운이 좋아 출간해도 팔릴 가능성이 희박한 소설을 쓰는 게 무슨 의미인지 고민이 앞섰다. 내 몸을 힘들게 내.. 2022. 7. 19.
배지영 소설집 <근린생활자>(한겨레출판) 반지하 월세를 전전하다 무리한 대출을 껴서 마련한 근생 빌라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중소기업 근로자. 북한 부동산에 투자한 뒤 통일만 기대하며 거리로 나서는 태극기 부대 노인. 자신도 정체를 모르는 독극물을 땅에 묻는 공공기관 하청업체 직원. 노인을 대상으로 성매매하는 박카스 아줌마 생리 도벽 때문에 가족에게 버림 받은 뒤 절도로 삶을 이어가는 초로의 여인. 자신이 개발한 철 지난 청소기를 팔러 다니는 연구원 출신 외판원. 이 소설집의 가장 훌륭한 부분은 우리 주변에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혹은 보지 않으려 했던) 사람들의 삶을 깊게 들여다본다는 점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모두 성실하게 살았지만, 내리막길 밖에 보이지 않는 인생이다. 현재 머무는 자리에서 밀려나지 않으려고 애를 쓰다 보니 미래를 생각할 .. 2022. 5.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