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1961 손더 장편소설 『시간도둑』(한끼) 시간이 지나치게 빨리 흐른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나이가 들수록 그런 기분을 느낄 때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달력을 살펴보며 깜짝 놀랐다. 벌써 5월 말이라고? 벌써 1년의 절반 가까이가 지나가 버렸다고? 제대로 한 일도 없는데 벌써? 혹시 내 시간을 도둑질하는 놈이 있는 건 아닐까? 이 작품은 그런 발칙한 상상에서 시작한다. 이 작품은 기발한 설정 위에 서 있다. 인간은 평행우주 일곱 곳에서 각각 살아가고 있고 200년의 시간을 공유한다. 누군가가 의미 없이 쓴 시간을 회수해 보관했다가 죽음 이후에 쓸 수 있게 하는 '균형자'라는 존재가 있다. 더불어 누군가를 죽여서 그가 가진 시간을 회수하는 '처리자'라는 존재도 있는데, 이들은 '균형자'와 별개로 움직인다. 이 작품은 '처리자'에.. 2025. 5. 21. 김유진 장편소설 『평균율 연습』(문학동네) 소설 제목을 보면 어떤 이야기를 담은 작품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는데, 이 작품 앞에선 짐작이 모두 빗나갔다. 나는 이 작품이 피아노 연주자를 주인공으로 세우고,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을 소재로 다룬 장편소설일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주인공의 직업이 편집자여서 짜게 식었다. 작품의 주인공이 작가이거나, 출판사 관계자이거나, 대학 관계자면 한숨부터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다. 한국 작가들의 경험치와 시야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 같아서 말이다. 기대감을 완전히 내려놓고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는데, 짜게 식었던 마음이 슬슬 사라졌다. 피아노 조율사로 전직을 준비하는 편집자에 관한 이야기였고, 직업 묘사가 대단히 디테일해 놀랐다. 나는 피아노는 몰라도 기타는 오랫동안 만져왔기에, 이 작품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2025. 5. 20. 앤솔러지 『우리의 연애는 모두의 관심사』(마름모) '불륜'을 주제로 다룬 앤솔러지라는 소문 때문에 끌려서 읽었는데, 폭싹은 아니고 살짝 속았수다. 책 뒷표지 상단에 "나는 그녀에게 살아 있는 딜도조차 아니었다"는 문장이 떡 하니 박혀 있고, 그 아래에 "사랑에 관해 은폐된 것들/불륜 혹은 금기의 앤솔러지"라는 문장이 달려있으니, 소싯적에 몰래 야설을 돌려 읽었을 때처럼 설렜을 수밖에. 사실 이 앤솔러지의 주제는 '불륜'보다는 '금기'에 방점이 찍혀 있다. '불륜'을 주제로 다뤘다는 소문은 마케팅을 위한 귀여운 어그로로 이해하자. 물론 '불륜'을 다룬 작품도 있으니 100% 어그로는 아니다. 원래 순애보보다 막장극이 보는 맛이 나지 않던가. 이 앤솔러지에 실린 네 작품 모두 화려한 '내로남불'의 향연이다. 작가 이름을 가리고 읽어도 어떤 작가의 작품인지 .. 2025. 5. 19. 도선우 장편소설 『도깨비 복덕방』(나무옆의자) 다음 행보가 정말 궁금했던 작가다. 국내 굴지의 장편소설 공모인 세계문학상과 문학동네 소설상을 동시에 받아 화제를 모았던 작가이니 말이다. 단편소설로 응모하는 신춘문예에선 다관왕이 가끔 등장하지만, 장편소설 공모 다관왕은 그야말로 천운에 가깝다. 장편소설 집필은 단편소설 집필보다 훨씬 품과 많은 시간이 드는 작업이다. 장편소설 공모 경쟁률은 신춘문예보다 낮은 편이지만, 못해도 100대 1은 넘어간다. 단편소설 집필보다 물리적인 진입 장벽이 높아서 허수도 적다. 천운은 물론 실력까지 따라줘야 한다. 21세기 들어와 장편소설 공모에서 이 정도 임팩트를 보여준 작가는 서유미, 장강명뿐이다. 그런 작가의 신작 소식이 지나치게 뜸해서 의아했다. 단편을 전혀 안 쓰는지 문예지나 앤설러지에서도 이름을 볼 수 없었다... 2025. 5. 18. 2025년 5월 4주차 추천 앨범 ▶비비 [EVE:ROMANCE] * 살짝 추천 앨범 ▶사뮈 [음] ▶한돌 [한돌 타래 : 천천히] ▶레인보우99 ]BKK] ▶트리플에스 [] p.s. 비비 앨범의 두 번째 트랙 '홍대 R&B'의 가사가 귀에 쏙 들어왔다. 내가 음악기자 시절에 느꼈던 홍대앞 정서를 정말 잘 표현한 곡이다. 2025. 5. 18. 이릉 장편소설 『쇼는 없다』(광화문글방) 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 사이에 어린 시절을 보낸 남자라면 공통으로 가진 추억의 키워드 하나가 있으니, 바로 프로레슬링이다. 그 시절 프로레슬링의 인기는 정말 대단했다. 동네 비디오 가게에 '로얄럼블', '헐크매니아', '올스타전' 등 경기 영상을 담은 비디오테이프 입고되면 아이들은 일제히 흥분했다. VHS 비디오테이프 플레이어가 있는 집에 한데 모인 아이들은 함께 영상을 보며 환호했고, 영상이 끝난 뒤에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아이들은 서로에게 경기 기술을 흉내 내며 놀았다. 마치 군대에서 국가대표 축구 경기를 중계 영상을 함께 보다가 운동장으로 공을 들고 뛰쳐나가는 군인들처럼. 특히 동네에 있는 방방(대전에선 트램펄린을 이렇게 불렀다)은 드롭킥, 스피어 등 레슬러 기술을 재현하기에 최적인 공간이.. 2025. 5. 18. 안윤 소설집 『모린』(문학동네) 몇 년 전 작가의 데뷔작 장편소설 『남겨진 이름들』을 읽고 감탄했었다. 키르기스스탄을 배경으로 현지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한국 소설은 상상해 보지 못했으니 말이다.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깊은 시선과 섬세하면서도 우아한 문장이 인상 깊은 작품이었다. 이 소설집의 분위기는 데뷔작과 다르지만, 일상적인 소재를 일상적이지 않게 다루는 방식이 좋았다. 등장인물의 심리를 묘사하는 문장 역시 데뷔작처럼 섬세하고 우아하다. 장애에 가로막혀 쉽게 소통하기 어려운 마음을 들여다보고(모린), 가장 가까운 사람에 관해 과연 얼마나 아는지 묻기도 하며(핀홀), 오랜 세월 놓지 못한 마음이 끝내 가닿지 못한 채 사라져 버리기도 한다(작은 눈덩이 하나). 소설의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차분한데 그 아래에 깔린 정서는 격정적일 때가 .. 2025. 5. 11. 2025년 5월 3주차 추천 앨범 ▶혁오, Sunset Rollercoaster [AAA Live]▶Leaveourtears [acid sugar] ▶Sookqueen Electric But Emotional [Sookqueen Electric But Emotional Part.1] ▶송용창&최민석 [Call Me The Small Room] * 살짝 추천 앨범 ▶개화 [LETTERS TO JULIET] ▶KAHO [UNIVERSE] ▶너울시 [기대로부터] 2025. 5. 11. 복거일 저 『제4차 공생』(무블) 이 책의 성격을 뭐라고 정의해야 할까. 대중적인 교양서라고 부르기엔 내용이 꽤 어렵고(참고 문헌 목록의 압박!!), 학술서라고 부르기엔 분량이 애매하고... 이 책은 그 둘 사이 어딘가의 지점에 놓여 있다. 읽는 동안 컴퓨터 자격증 수험서의 이론 부분을 복기하는 기분이 들 때도 있었다. 개론서라고 정의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팔순에 가까운 저자의 나이를 의식하고 읽으니 글이 젊다고 느껴져 놀랐다. 저자는 AI가 등장한 역사적 배경을 비롯해 최신 기술 동향을 진화생물학, 컴퓨터과학, 천체물리학, 철학 등 다양한 학문과 엮어 꼼꼼하게 분석한다. 분야를 넘나들며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대목에선 '한국 SF의 거장'이라는 저자의 짬밥을 새삼 실감했다. 저자는 원핵생물이 동·식물로 진화하는 시기를 1차 공생, 동.. 2025. 5. 11. 이전 1 2 3 4 5 6 7 ··· 218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