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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미 소설집 『밤이 영원할 것처럼』(문학동네) 감정을 울렁이게 만드는 책이 있고, 감정을 차분하게 정리해 주는 책이 있는데, 이 책은 후자에 가까웠다. 오래전 습작 시절에 읽은 작가의 장편에서 느껴졌던 톡톡 튀는 발랄함은 이제 찾아보기 어렵다. 대신 작은 것을 다룰지라도 다각도로 들여다보는 깊은 시선이 있다. 그게 작가의 짬밥인가 보다. 이 소설집에는 일곱 개 단편이 실려 있는데, 이들을 하나로 엮는 키워드는 '밤'이다. 그중 두 편은 동인지와 문예지로 먼저 읽은 구면이어서 반가웠고, 다섯 편은 새로 읽는 단편이어서 반가웠다. 소설집이라는 게 재미있다. 소설집에 실리는 단편은 저마다 작가가 다른 때에 쓴 서로 별 관련 없는 작품인데, 특정 키워드를 매개로 엮이면 마치 완성된 퍼즐 조각처럼 새로운 그림을 보여주니 말이다. 밤은 고요하지만, 예상치 못한.. 2024. 9. 15.
김탁환 장편소설 『참 좋았더라』(남해의봄날) 그림을 잘 모르는 나는 이중섭 하면 그의 비극적인 삶부터 떠올리게 된다. 여러 명작을 남겼으나 당대에 제대로 평가받지 못해 좌절했고, 일본에 두고 온 가족을 그리워하다가 말년에 정신병원을 전전하며 무연고자로 요절한 비운의 천재 화가. 대표작인 '소' 시리즈를 제외하면 이중섭의 다른 작품은 그의 비극적인 삶에 가려진 감이 없지 않다. 이 작품은 바로 이 맹점을 찌른다. 삶이 비극으로 점철된 화가가 과연 여러 명작을 남길 수 있었을까? 작가가 이중섭의 생애에서 주목한 부분은 통영에서 보낸 반년이다. 이중섭은 그 짦았던 시절에     등 대표작을 그렸고 통영 곳곳의 모습을 담은 풍경화도 여럿 남겼다. 그 시절이 이중섭이 창작에 집중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평화로운 시절이 아니었을까? 전후 문화예술인들의 이야.. 2024. 9. 14.
조해진 장편소설 『빛과 멜로디』(문학동네) 5년 전에 읽었던 작가의 장편소설 『단순한 진심』은 지금도 내게 감동적인 기억으로 남아있다. 대한민국 사회의 소외된 곳과 그곳에 속한 사람들을 그저 작품 소재로 다루지 않는 사려 깊은 마음이 느껴졌고, 인간을 향한 신뢰와 희망을 잃지 않는 작가의 시선이 따뜻해서 좋았다. 작가는 이번 작품에선 시선을 대한민국 바깥으로 넓힌다. 지금도 분쟁이 끊이지 않는 시리아, 우크라이나, 팔레스타인으로. 그리고 이들 국가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이 향하는 영국으로. 소설로 다루는 공간이 광범위해진 만큼 등장인물들의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는 스케일도 커졌다. 같은 반 아이가 굶을까 봐 돈이 될 것으로 보이는 카메라를 집에서 몰래 가져와 건네는 아이의 간절한 마음이 시작이다. 그 마음이 카메라를 들고 전장을 오가며 끔찍한 현장을 .. 2024. 9. 12.
정유정 장편소설 『영원한 천국』(은행나무) 데이터로 만든 기억과 정신을 온라인 세계로 옮겨 육신 없이 영생하는 세상. 여러 드라마, 영화, 소설 등에 쓰인 매력적인 소재다. 나 역시 「시간을 되돌리면」이라는 단편소설로 다뤘던 소재이기도 하고. 이 작품은 이 같은 SF소재에 작가의 주특기인 스릴러를 엮은 하이브리드다. 솔직히 뻔하고 흔한 소재다. 뻔하고 흔하다는 건 그만큼 매력적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문제는 어떻게 다루느냐에 달려있다. 작품을 들여다보자. 생전의 모든 기억과 정신을 온전히 유지하면서도 육신으로 느낄 수 있었던 모든 감각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가상 세계 '롤라'의 등장이 임박하고, '롤라' 행 티켓이 유심 형태로 무작위로 뿌려진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뻔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티켓을 찾으려는 자, 거래하려는 자, 빼앗으려는 자.. 2024. 9. 11.
유은지 장편소설 『귀매』(문학동네) 읽으면서 영화 「파묘」를 보는 기분이 들었다. 「파묘」의 소재는 일본 요괴인 '오니'이고, 이 작품의 소재 역시 요괴의 일종으로 우리에겐 낯선 '귀매'다. 또한 이 작품도 「파묘」처럼 무속 신앙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와 친일파 등을 다루기 때문에 기시감이 많이 들었다. 이 작품은 2002년에 출간된 원작의 개정판이니, 「파묘」가 이 작품을 닮았다고 말하는 게 옳겠다. 이 작품은 우연히(알고 보면 철저한 계획에 따라) 마을 제의 연구를 위해 부산 다대포를 찾았다가 초자연적인 사건에 얽힌 대학생들의 개고생을 그린다. 이 과정에서 일제강점기 당시 다대포에서 벌어진 비극과 누군가의 거대한 탐욕이 드러나고, 이에 따라 마을에 쌓인 원한이 넘쳐흘러 위험수위에 다다른다.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영능력과 문화인류학이라는 전.. 2024. 9. 9.
2024년 9월 2주차 추천 앨범 ▶잠 [빛나] ▶이선지 [Eternal] * 살짝 추천 앨범 ▶데이식스 [Band Aid] ▶웨이브 투 어스 [play with earth! 0.03] ▶사람또사람 [어른의 세계] ▶온유 [FLOW] ▶롱타임노쉿 [2151] ▶투 데이 올드 스니커즈 [펭귄 신드롬!] 2024. 9. 8.
정민 장편소설 『아바나 리브레』(리브레) 일단 배경과 설정만으로도 먹고 들어가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배경은 한국과 정식 외교관계를 맺고 있지 않은 나라였던(참고로 올해 2월에 수교했다) 쿠바다. 북한과 오랜 세월 우호 관계를 맺어왔고, 외교적으로 책임질 일이 없는 사회주의 국가.  그곳에 북한 최고 존엄의 불알친구가 있다.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는 국정원 요원이 최고 존엄의 불알 친구을 대상으로 한 비밀공작을 진행하겠다는 핑계로 쿠바로 건너가 놀고먹으려고 한다.  무려 1년 동안이나. 작전명은 칵테일 이름과 비슷한 '아바나 리브레'. 끌리지 않는가? 한국 소설의 배경이 대부분 한국을 벗어나지 못하는데, 이 작품의 배경은 그냥 외국이 아니라 한국인에게 대단히 낯선 쿠바다. 페이지를 넘기는 내내 이국적인 정취가 물씬 풍긴다. 맡아보지도 못한 시가.. 2024. 9. 8.
박솔뫼 산문집 『책을 읽다가 잠이 들면 좋은 일이 일어남』(위즈덤하우스) 작가가 사랑하는 여러 국내외 여러 작가와 작품에 관해 쓴 독서 산문집이다. 제목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지었다. 다소 길지만 장바구니에 집어넣도록 강력하게 유혹하는 제목이다. 어떤 책이든 그렇지 않겠느냐마는, 산문집의 주제는 작가가 정말 좋아하는 주제여야 한다. 다른 책은 몰라도 산문집은 그런 주제가 아니면 절대 편안하고 좋은 글이 나오지 않는다. 작가는 로베르토 볼라뇨의  『전화』를 시작으로 다카하시 겐이치로, 하라료 등 본인에게 많은 영향을 준 다양한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즐겁게 풀어놓는다. 여기서 방점은 '즐겁게'에 찍혀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작가가 이 산문집에 인용한 작품을 얼마나 즐겁게 읽었는지 느껴진다. 그래서 이 산문집은 단순한 감상을 넘어 어떤 책은 어떻게 읽.. 2024. 9. 7.
최수진 연작소설 『점거당한 집』(사계절) 소설을 읽는다기보다는 무대에서 펼쳐지는 실험적인 퍼포먼스를 감상하는 기분이 들었다. 형식만 보면 최근에 읽은 모든 작품 중에서 가장 독특하고 파격적이었다. 소설과 미술의 경계뿐만 아니라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경계도 없다. 이 책에 실린 단편소설 세 편은 분명히 허구이지만 마냥 허구라고 볼 수가 없다. 십수 년 뒤에 이 땅에서 벌어지는 원전 사고, 사고 이후 고립된 도시에서 벌어지는 온갖 사건들, 여기에 절묘하게 엮이는 예술 작품과 작가의 삶. 익숙한 서사 구조를 기대하고 읽으면 당황스러울지도 모르겠다. 현장 기록(물론 허구다)을 나열하는 형태로 전개되다가, 인터뷰(역시 허구다)가 튀어나오는데, 소설보다는 르포를 읽는 듯한 기분이 들 때도 있었다. 과거와 현재의 역사과 실존하는 예술 작품을 바탕으로 .. 2024. 9.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