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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진 연작소설 『점거당한 집』(사계절) 소설을 읽는다기보다는 무대에서 펼쳐지는 실험적인 퍼포먼스를 감상하는 기분이 들었다. 형식만 보면 최근에 읽은 모든 작품 중에서 가장 독특하고 파격적이었다. 소설과 미술의 경계뿐만 아니라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경계도 없다. 이 책에 실린 단편소설 세 편은 분명히 허구이지만 마냥 허구라고 볼 수가 없다. 십수 년 뒤에 이 땅에서 벌어지는 원전 사고, 사고 이후 고립된 도시에서 벌어지는 온갖 사건들, 여기에 절묘하게 엮이는 예술 작품과 작가의 삶. 익숙한 서사 구조를 기대하고 읽으면 당황스러울지도 모르겠다. 현장 기록(물론 허구다)을 나열하는 형태로 전개되다가, 인터뷰(역시 허구다)가 튀어나오는데, 소설보다는 르포를 읽는 듯한 기분이 들 때도 있었다. 과거와 현재의 역사과 실존하는 예술 작품을 바탕으로 .. 2024. 9. 7.
김애란 장편소설 『이중 하나는 거짓말』(문학동네) 이 작품은 김애란 작가의 두 번째 장편소설이자 무려 13년 만에 내놓는 새 장편소설이다. 이 작품 역시 작가의 첫 장편소설 『두근두근 내 인생』처럼 10대 청소년을 등장인물로 내세운 성장소설이다.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이중 하나는 거짓말’은 등장인물들의 선생님이 제안한 게임으로, 자신에 관한 다섯 가지 정보를 말하면서 거짓말 하나를 끼워 넣는 게 규칙이다. 등장인물들은 거짓말을 공유하면서 서로를 의심하고 때로는 이해하면서 점점 성숙해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말과 글이라는 게 그렇다. 진실이든 거짓이든 말과 글에는 발화하거나 쓰는 사람이 묻어난다. 감추려 애쓰면 드러나고, 드러내려고 애를 쓰면 감춰진다. 서로의 거짓말이 점점 진실에 가까워지는 모습과 등장인물들의 심리 변화를 그리는 작가의 필치가 간결하면서.. 2024. 9. 3.
차무진 장편소설 『나와 판달마루와 돌고래』(생각학교) 차 작가가 쓴 『여우의 계절』은 올해 들어 읽은 모든 장편소설 중 한 손으로 꼽을 수 있을 만큼 기억에 남는 진중한 작품이다. 그런데 이 작품, 지구를 멸망시키러 온 외계인과 딱히 지구를 지킬 마음은 없는데 지키게 된 소년의 어색한 브로맨스를 다룬다. 해양 오염, 펜데믹, 가족 문제 등 묵직한 소재가 브로맨스와 엮이니 묵직함은 줄어들고 유쾌함이 더해진다. 작가 이름을 가리고 이 작품을 읽는다면 『여우의 계절』을 과 『인더백』을 쓴 작가라고 상상하기 쉽지 않을 테다. 이 작품에서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는 외계인이다. '새우탕 큰사발'에 환장하는 외계인이라니. 앉은 자리에서 '새우탕' 서너 개를 까는 외계인을 본 일이 있는가. 어처구니없긴 한데, 그걸 보는 나도 침을 질질 흘리다가 자정 넘어 '새우탕'에 뜨거.. 2024. 9. 3.
2024년 9월 1주차 추천 앨범 ▶윤석철트리오 [나의 여름은 아직 안 끝났어] * 살짝 추천 앨범 ▶푸디토리움 [Prologue : Hope] ▶르세라핌 [CRAZY] ▶집단지성 [구원몽] ▶찬열 [Black out] ▶재현 [J] ▶제로베이스원 [CINEMA PARADISE] ▶오마이걸 [Dreamy Resonance] 2024. 9. 1.
박현욱 장편소설 『원할 때는 가질 수 없고 가지고 나면 원하지 않아』(문학동네) 이 작품이 박현욱 작가가 무려 18년 만에 내놓는 새 장편소설이라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그렇게 긴 세월이 흘렀다는 말인가. 그런데도 여전히 박현욱 작가는 내게 가장 도발적인 질문을 했던 작가로 남아 있다. 데뷔작 『동정 없는 세상』과 최근작(?) 『아내가 결혼했다』만큼 파격적이고 논쟁적이고 이야깃거리가 많았던 장편소설이 또 있었나. 하나같이 통념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는 캐릭터들인데, 반발심이 들다가도 묘하게 설득력이 있어 미워할 수가 없었다. 신간을 확인할 때 박현욱이라는 이름을 정말 오랜만에 발견하고 1초도 고민 없이 장바구니에 넣었다. 이 작품은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 대학 동창 태주와 재하, 재하의 여자친구 명 사이에서 벌어지는 연애담을 그린다. 태주는 재하와 딱히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명에게 .. 2024. 9. 1.
정명섭 장편소설 『조선 변호사 홍랑』(머메이드) 이 작품은 지금까지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조선 시대 쟁송제도, 그중에서도 민사소송에 해당하는 사송(詞訟) 절차를 실제 역사 속 사건과 엮어 흥미롭게 다룬다. 주인공은 '법꾸라지'가 판 함정 때문에 아버지가 화병으로 억울하게 죽자 규방 여인에서 약자를 돕는 남장여자 외지부(변호사)로 각성해 활약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이 작품이 다루는 사건 모두 실제 역사에 기록된 사건이 바탕이다. 그 때문에 오래된 과거의 사건인데도 현장감이 상당하다. 죄가 있든 없든 일단 잡아들인 뒤 "네 죄를 네가 알렸다!"고 호통치며 주리를 틀고 인두로 지지는 '원님재판'이 사극이 묘사하는 사법절차의 클리셰다. 그러다 보니 근대 이전 한반도에서 법치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여기는 이들이 많다. 학부 전공이 법학이어서 근대 이전 소송 .. 2024. 9. 1.
김혜나 산문집 『술 맛 멋』(은행나무) 산문집 두 권을 출간한 경력이 있고, 내년에도 새로운 산문집을 낼 계획이다 보니, 산문집을 쓸 때 고충을 나름 안다. 어떤 산문집이든 주제를 갖고 있기 마련이다. 이 산문집의 주제는 술이다. 명확한 주제다. 주제가 명확할수록 쉽게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게 의외로 쉽지 않더라. 주제에 관한 지식과 정보 제공이 앞서면 읽는 재미가 떨어지고, 지나치게 감상만 늘어놓으면 글이 느끼해져 소화하기가 버겁다. 그래서 이 산문집을 기대했다. 작가가 오랫동안 좋은 작품을 써 왔던 소설가이면서 동시에 술에 관해 조예가 깊은 프로페셔널(내눈에는 그렇다)이니까. 이런 교집합을 가진 작가는 내 데이터베이스에는 단 한 명뿐이다. 읽은 소감을 단 한 단어로 요약하면 '말모'다. 몰랐던 훌륭한 우리 술 위에 국내외 문학 명작이.. 2024. 8. 31.
김훈 산문집 『허송세월』(나남) 김훈은 신간이 나오면 습관처럼 사서 읽는 작가이지만, SNS에 읽었다는 티를 내기가 부담스럽다. 예나 지금이나 구름 위 높은 곳에 머무는 존재 같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려워서 말이다. 그래도 조심스럽게 한마디 보태자면, 김훈은 소설보다 산문이 더 좋은 작가라고 생각한다. 이 산문집의 문장 역시 휘황해서, 페이지를 넘기는 내내 눈 호강을 하며 감탄했다. 더불어 깊은 한숨도 자주 터져 나왔다. 작가가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음이 곳곳에서 엿보였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 사이의 어딘가를 집요하다는 표현이 모자랄 정도로 파고드는 문장을 볼 때마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나보다 더 나이 먹은 이들이 보면 가소롭겠지만, 40대 중반에 들어서니 부쩍 몸이 달라졌음을 느낀다. 예전보다 적게 먹는데도(물론 내 기준이다) 달라.. 2024. 8. 29.
임발 소설집 『도망친 곳에서 만난 소설』(빈종이) 거두절미하고 재미있다. 동시에 무척 씁쓸하다. 그리고 미세하게 통쾌하다. 장류진 작가의 소설에서 씁쓸함의 농도를 확 끌어올리면 이런 결과물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책을 덮으니 드림카카오 82% 한 통을 입안에 털어놓고 우적우적 씹어먹은 듯한 기분이 든다. 상당히 독한 하이퍼리얼리즘 소설의 모음이다. 이 소설집에는 자만, 착각, 상심, 오만, 기대, 망각이라는 주제로 쓴 여섯 단편이 실려 있다. 마치 가톨릭이 규정하는 칠죄종(교만, 인색, 질투, 분노, 색욕, 탐욕, 나태)을 연상케 하는 콘셉트다. 단편마다 주제는 달라도 어떤 형태로든 일하는 사람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점은 같다. 직장 생활을 오래 해 봤거나 관련 직종에 관해 상세하게 취재한 작가가 아니면 쓸 수 없는 디테일이 가득하다. 자만으로 가득한.. 2024. 8.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