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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율 장편소설 <이 별이 마음에 들어>(광화문글방) 1978년 대한민국 서울에 불시착해 여공으로 살아가는 외계인. 설정만으로도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흥미롭지 않은가. 설정만 보면 SF스럽지만, 이 작품은 이방인의 시선으로 과거 대한민국의 열악한 노동 현실이 요즘에 어떤 형태로 반복되고 있는지 보여주는 노동소설이다. 그렇다고 해서 읽기에 무거운 소설은 아니다. 오히려 경쾌하고, 심지어 웃기다. 주인공이 떠나온 행성의 생존 매뉴얼에 따르면, 낯선 행성에 불시착했을 때 생존율을 높이는 방법은 그 행성에서 가장 고등한 생명체로 변신하기다. 하필 주인공이 맨 처음 마주친 고등 생명체는 여공이었고, 주인공은 가장 평균적인 모습을 가진 여공으로 변신해 공장에 스며든다. 그곳에서 주인공은 그야말로 미친 학습 능력을 발휘해 말도 안 되는 단기간에 시다, 미싱사를 거쳐 .. 2023. 12. 10.
백지영 장편소설 <하우스푸어 탈출기>(알렙) 평생 셋방을 전전하며 살다가 영끌해 평생소원인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뤘다. 그런데 세입자를 들일 때마다 문제가 생기고, 얼마 안 되는 월급은 버는 족족 주택담보대출 이자를 갚는 데 써야 한다. 어깨에 짐처럼 짊어진 집을 끝까지 지키는 게 옳은지, 집에서 벗어나는 게 옳은지 고민하던 주인공. 그런 주인공에게 더 큰 고민을 짊어지게 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회사 후배 직원이 상사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고 호소하다가 억울하게 회사에서 쫓겨났는데, 공교롭게도 주인공은 성추행 현장을 촬영한 사진을 증거로 가지고 있다. 후배의 처지는 가엾지만, 괜히 나섰다간 상사에 밉보여 회사에서 쫓겨나 월급이 끊겨 이자 상환이 밀리고 집을 내놓아야 할지도 모른다. 당신이 주인공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이 작품은 부당한 현실과.. 2023. 12. 8.
배명훈 연작소설집 <화성과 나>(래빗홀) 소싯적에 과학자를 꿈꾸며 이나 같은 잡지를 열독했던 시절이 있었다. 과학 잡지답게 우주 탐사를 주제로 다룬 기사와 사진이 많이 실려 있었는데, 지금까지 내 기억에 강렬하게 남아 있는 건 튜브에 담긴 우주식량을 짜 먹는 비행사의 모습이다. 식사하는 비행사의 표정이 딱히 즐거워 보이진 않았지만, 나는 그 맛이 정말 궁금해 미치는 줄 알았다. 지금이야 튜브 안의 내용물이 유동식일 테고, 지구에서 차려 먹는 음식보다 맛이 없다는 걸 충분히 짐작하지만, 어린 시절 내 눈에는 그저 맛있어 보였다. 이젠 단순히 배를 채우기 위해 먹는 음식은 식량보다 사료에 가깝다는 걸 알기에, 비행사들이 당시에 얼마나 고생했을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요즘 우주비행사는 과거보다 음식다운 음식을 먹는 듯하지만, 잘 해봐야 동결건조 .. 2023. 12. 8.
이태관 시집 <어둠 속에서 라면을 끓이는 법>(현대시) 연근조림, 순간, 아욱국, 고등어조림, 땡초전, 양꼬치, 골뱅이무침, 순두부, 취하, 오징어볶음, 아귀찜, 청국장, 굴국, 동태찌개, 김치찌개, 깻잎전... 읽기만 해도 침이 고이는 아는 맛들이 크고 작은 일상과 버무려져 시어로 펼쳐지니, 읽으면 괜히 배가 고파지고 기분이 짠해지는 시집이다. 달아오른 숯에 닿은 양꼬치 기름이 연기처럼 피어올라 흩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아 눈물을 훔치는 어머니를 생각하고(양꼬치), 매콤한 감자 짜글이를 먹으며, 아버지를 선산에 묻고 내려오던 길을 떠올린다(감자 짜글이). 때로는 시 자체가 레시피이기도 하다. 오징어볶음을 만들 땐 식감 살리기 위해 1.5센티 몸통과 다리를 잘라야 한다고 조언하고(오징어볶음), 개성 강한 재료를 하나로 묶어 전으로 만드.. 2023. 12. 5.
이경준 <카펜터스>(그래서음악) 내가 카펜터스(Carpenters)에 관해 아는 건 그리 많지 않다. 'Top of the world' 'Yesterday once more' 등 멜로디가 좋은 히트곡을 여럿 가진 미국 출신 남매 듀오라는 게 내가 아는 전부다. 카펜터스가 활약했던 시대는 1970년대이고, 나는 그때 존재하지도 않았으니, 자세히 아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일 테다. 달달한 음악은 내 취향이 아니기도 했고. 그런데도 이 책을 사서 읽은 이유는 등 저자의 전작을 읽으며 쌓인 신뢰 때문이다. 지금까지 록을 주로 다뤄온 저자가 의외의 뮤지션을 다룬 단행본을 냈다면 이유가 있을 테니 말이다. 이 평전은 카펜터스의 멤버인 캐런 카펜터와 리처드 카펜터의 인생을 따라가며 그들의 음악 여정에 담긴 의미를 친절하게 짚는다. 그 과정에서 동원.. 2023. 12. 3.
2023년 12월 2주차 추천 앨범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 [1969] ▶정밀아 [리버사이드] ▶유키카 [Time-Lapse] * 살짝 추천 앨범 ▶조명섭 [조명섭과 명싸-운드 작품집 Vol.2] ▶태연 [To. X] ▶남우현 [WHITREE] 2023. 12. 3.
은모든 장편소설 <한 사람을 더하면>(문학동네)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 포르투갈 전 총리 같은 독재자가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 에 등장하는 '피의 그믐날' 이후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날이 오면 이 작품 속 대한민국과 비슷하지 않을까. 이 작품은 코로나19 같은 팬데믹이 몇 차례 더 벌어지고 경제 위기가 심각해진 2040년대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적당히' 무너진 세상을 겨우겨우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의 일상을 그린다. 작품 속 대한민국 국민의 생활 수준은 계란 한 알 먹기 부담스러울 정도로 과거보다 열악한데, 디스토피아라고 부르기엔 뭔가 하찮다. 천천히 침몰하는 거대한 배, 천천히 끓는 물 속 개구리 같은. 지속된 경제 위기 때문에 안 그래도 낮은 출생률은 더 낮아지고 노년층이 급증하자 정부는 독신세 부담을 점점 늘린다. 이 같은 설정을 소설로만 .. 2023. 11. 28.
2023년 11월 5주차 추천 앨범 ▶카코포니 [DIPUC] ▶코토바 [Humanoid operational] ▶아닌 [여자, 아닌 ANIN, A-WOMAN] ▶호와호 [파고] ▶이부영 [애호가의 호흡] ▶오희정 [I'm a ghost] * 살짝 추천 앨범 ▶시황 [도화] ▶연정 [사랑을 사람으로 그린다면] ▶김창완 [나는 지구인이다] ▶오칠 [The Burning City] ▶드림캐쳐 [VillainS] ▶배드 넘버 나인 [Butterfly] 2023. 11. 27.
최유안 연작소설 <먼 빛들>(앤드) 최근 들어 한국 문학계에서 보이는 중요한 흐름 중 하나는 일하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소설이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소설이 과거에 없진 않았지만, 최근에 노동을 다루는 소설은 노동 그 자체를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이념을 강조했던 과거 노동 소설과 차이를 보여준다. 나는 현실에 발붙인 서사를 사랑하고 그중에서도 땀 흘리는 소설을 편애한다. 그런데 그런 소설을 읽다 보면 일부 노동 현장이 비어있음을 느낄 때가 많다. 그중 하나는 우리 주변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노동인 막노동이 이뤄지는 현장이다. 이는 나를 포함해 작가 대부분이 막노동을 구체적으로 경험한 일이 드물고, 막노동 현장을 오래 경험한 사람은 자기 경험을 굳이 밝히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평생 막노동을 한 아버지는 내게.. 2023. 11.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