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1994 황여정 장편소설 『숨과 입자』(창비) 나는 누구인가? 정말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우리는 어떤 형태이든 조직에 속해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 질문에 더욱 대답하기가 어렵다. 개인이란 존재가 무력하게 느껴질 때가 많으니 말이다. 특히 퇴사를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다들 알고 있지 않은가. 나 하나 사라진다고 작동이 멈추는 조직은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 작품 속 주인공도 그렇다. 안정된 직장을 찾기가 어렵고, 그러다 보니 주거 환경 역시 불안정하고, 겨우 자리 잡은 직장에서도 알게 모르게 차별이 벌어지고, 꿈과 열정으로 포장한 노동 착취가 만연하고, 원하는 삶은 있는데 그게 정말 원하는 삶인지 모르겠고... 그렇게 서서히 나를 잃어가던 주인공은 갑작스러운 사고로 폭발해 자기에게 묻는다. 나는 도대체 누구지? 이 작품을 한 문장으로 .. 2025. 5. 30. 이유리 소설집 『비눗방울 퐁』(민음사) 작가의 대표작이자 데뷔작인 소설집 『브로콜리 펀치』를 읽고 느꼈던 기분이 지금도 생생하다. 현실적이면서 비현실적이고, 익숙한데 낯설며, 웃기면서도 슬프고, 경쾌하나 우울한... 어렵지만 형용사 하나로 그때 느낀 기분을 요약하자면 '명랑하다' 정도 되겠다. 돌아서서 생각해 보면 심각한 이야기인데도, 읽고 나면 괜히 기분이 좋아지는 작품의 모음이었다. 경험하지 못하면 제대로 쓰지 못하는 나로서는 다채로운 상상력이 정말 부러운 작가다. 국내 작가 중에서 이 정도로 다채로운 상상력을 읽기 쉬운 문장으로 풀어내는 작가가 더 있을까 싶다. 이 소설집을 읽고 느낀 감정은 데뷔작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슬픔과 우울함의 농도가 조금 짙어졌다고 해야 하나. 이 소설집에 담긴 여덟 작품 대부분이 이별이나 죽음을 다루고 있기.. 2025. 5. 29. 2025년 5월 5주차 추천 앨범 ▶백현 [Essence of Reverie] ▶아이들 [We are] * 살짝 추천 앨범 ▶김재중 [Beauty in Chaos] ▶노르웨이 숲 [숲] ▶난파란 [난파:낯선 섬] ▶박원장 [Carry On] ▶20세기보이즈 [DEBUT] 2025. 5. 27. 단요 장편소설 『피와 기름』(래빗홀) 제동 장치가 작동하지 않는 기차가 선로 위를 달리고 있다. 선로 위에는 다섯 사람이 있다. 선로를 바꾸지 않으면 그들은 죽는다. 선로를 바꾸면 그들은 살지만, 바뀐 선로에 있는 사람 한 명은 죽는다. 당신 앞에 선로를 바꾸는 손잡이가 있다.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텐가? 소수를 위한 다수의 희생과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을 윤리 관점에서 바라본 '트롤리 딜레마'다. 비슷한 문제를 내보겠다. 눈앞에 보이는 소수를 살리기 위해 전 인류를 지옥에 살도록 내버려두는 게 옳은 일인가. 당신에게 세상을 끝낼 수 있는 권능이 있다면 그 권능을 어떻게 사용할 텐가. 이 문제를 신학이라는 관점에서 풀어내면 어떤 결론을 낼 수 있을까. 이 작품의 중요한 질문이다. 나는 이 질문에 "버리는 놈 따로 있고 치우는 놈 따로 있.. 2025. 5. 23. 정명섭 소설 『조종자』(꿈꾸는섬) 핵전쟁으로 자멸한 인류는 지구 대신 갈아탈 새로운 행성을 찾는 데 성공하지만, 도망친 곳에는 천국도 낙원도 없다지 않은가.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도 새듯 새로운 세계에서도 인류는 서로 반목하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미지의 괴물들이 살아남은 인류를 공격해 위기에 빠트린다.그런데 일부 괴물이 인류를 보호하고 괴물을 공격하는 희한한 일이 벌어진다.도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고, 인류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 걸까.필립 와일리의 SF 소설 『지구의 마지막 날(When Worlds Collide)』이 더 보여주지 않은 미래 세계(다만 비관적인)에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속 주인공이 더해지면 이런 이야기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싶었다.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 극단적인 기.. 2025. 5. 22. 전민식 장편소설 『길 너머의 세계』(은행나무) '수목장'이라는 흔치 않은 공간을 다룬 작품이다. 이 작품의 세 주인공은 저마다 드러나지 않은 사연을 가진 채 '수목장'이라는 직장에 모여 인연을 맺는다. 같은 직장에서 월급을 받는 사람 사이의 관계는 대체로 가깝고도 멀다. 서로가 서로를 궁금하게 여기는데, 굳이 깊이 들어가려 하지 않고,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는. 하지만 가족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는 관계여서 어려운 일을 함께 치르면 누구보다 끈끈해지기도 한다. 이 작품은 그저 그런 관계로 시작한 세 주인공이 서로가 서로에게 비빌 언덕을 만들어주면서 깊은 유대 관계를 쌓는 과정을 따뜻하고 섬세하게 보여준다. 끝까지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수목장 사장, 늦은 밤에 종종 벌어지는 암장, 비극적이면서도 의문이 가득한 죽음... 이렇게 말하니 무슨 범죄 소설.. 2025. 5. 22. 손더 장편소설 『시간도둑』(한끼) 시간이 지나치게 빨리 흐른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나이가 들수록 그런 기분을 느낄 때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달력을 살펴보며 깜짝 놀랐다. 벌써 5월 말이라고? 벌써 1년의 절반 가까이가 지나가 버렸다고? 제대로 한 일도 없는데 벌써? 혹시 내 시간을 도둑질하는 놈이 있는 건 아닐까? 이 작품은 그런 발칙한 상상에서 시작한다. 이 작품은 기발한 설정 위에 서 있다. 인간은 평행우주 일곱 곳에서 각각 살아가고 있고 200년의 시간을 공유한다. 누군가가 의미 없이 쓴 시간을 회수해 보관했다가 죽음 이후에 쓸 수 있게 하는 '균형자'라는 존재가 있다. 더불어 누군가를 죽여서 그가 가진 시간을 회수하는 '처리자'라는 존재도 있는데, 이들은 '균형자'와 별개로 움직인다. 이 작품은 '처리자'에.. 2025. 5. 21. 김유진 장편소설 『평균율 연습』(문학동네) 소설 제목을 보면 어떤 이야기를 담은 작품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는데, 이 작품 앞에선 짐작이 모두 빗나갔다. 나는 이 작품이 피아노 연주자를 주인공으로 세우고,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을 소재로 다룬 장편소설일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주인공의 직업이 편집자여서 짜게 식었다. 작품의 주인공이 작가이거나, 출판사 관계자이거나, 대학 관계자면 한숨부터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다. 한국 작가들의 경험치와 시야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 같아서 말이다. 기대감을 완전히 내려놓고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는데, 짜게 식었던 마음이 슬슬 사라졌다. 피아노 조율사로 전직을 준비하는 편집자에 관한 이야기였고, 직업 묘사가 대단히 디테일해 놀랐다. 나는 피아노는 몰라도 기타는 오랫동안 만져왔기에, 이 작품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2025. 5. 20. 앤솔러지 『우리의 연애는 모두의 관심사』(마름모) '불륜'을 주제로 다룬 앤솔러지라는 소문 때문에 끌려서 읽었는데, 폭싹은 아니고 살짝 속았수다. 책 뒷표지 상단에 "나는 그녀에게 살아 있는 딜도조차 아니었다"는 문장이 떡 하니 박혀 있고, 그 아래에 "사랑에 관해 은폐된 것들/불륜 혹은 금기의 앤솔러지"라는 문장이 달려있으니, 소싯적에 몰래 야설을 돌려 읽었을 때처럼 설렜을 수밖에. 사실 이 앤솔러지의 주제는 '불륜'보다는 '금기'에 방점이 찍혀 있다. '불륜'을 주제로 다뤘다는 소문은 마케팅을 위한 귀여운 어그로로 이해하자. 물론 '불륜'을 다룬 작품도 있으니 100% 어그로는 아니다. 원래 순애보보다 막장극이 보는 맛이 나지 않던가. 이 앤솔러지에 실린 네 작품 모두 화려한 '내로남불'의 향연이다. 작가 이름을 가리고 읽어도 어떤 작가의 작품인지 .. 2025. 5. 19. 이전 1 ··· 4 5 6 7 8 9 10 ··· 22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