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1994 최석규 장편소설 『검은 곳을 입은 자들』(문학수첩) 범죄스릴러에 철학, 오컬트, 음모론, 첨단 기술(?)을 버무린 종합 선물 세트다. 흡인력이 장난 아니다. 뒤 내용이 너무 궁금해서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결국 앉은 자리에서 다 읽었다. 이야기는 건실한 기업의 탈을 쓴 범죄 조직의 간부가 기괴한 방식으로 자살하는 데서 시작한다. 이 밖에도 곳곳에서 이해할 수 없는 방식의 자살이 속출하는데, 공교롭게도 그들 모두 천인공노할 죄를 지은 범죄자들이고 지금 뻔뻔하게 잘살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뻔한 설정이지만, 이 설정만으로도 흥미롭지 않은가? 찌라시에 가까운 자극적인 기사로 연명하는 한 언론사의 기자가 계속되는 의문의 죽음을 파헤치기 시작하고, 이 죽음에 얽힌 범죄 조직은 경쟁 조직을 의심하며 진상 조사에 나선다. 이들은 마침내 공통점.. 2025. 5. 4. 이석원 산문집 『슬픔의 모양』(김영사) 내 취향은 아니지만 정말 글을 잘 쓴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는 작가가 몇 명 있다. 이석원 작가도 그런 작가 중 하나다. 그러다 보니 스토커도 아닌데 꼬박꼬박 작가의 책을 챙겨 읽고 있고, 그럴 때마다 "참 잘 쓰는데 내 취향은 아냐"라고 투덜거리며 책을 덮곤 한다. 그런데 이 산문집은 잘 쓴 책을 넘어 심지어 내 취향이기까지 했다. 저마다 의견이 다르겠지만, 작가가 지금까지 쓴 모든 단행본 중 최고작이라는 게 내 의견이다. 이 산문집은 작가의 아버지가 코로나 펜데믹 당시 쓰러져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는 급박한 장면으로 시작한다. 아버지는 이제 가족을 돌보는 대상이 아니라, 온 가족이 돌봐야 하는 존재로 바뀐다. 그날부터 작가뿐만 아니라 어머니, 두 명의 누나의 일상도 급격한 지형 변화를 겪는다. 가족이.. 2025. 5. 3. 고다 아야 산문집 『나무』(책사람집) 이 산문집은 작가가 말년에 일본 곳곳의 나무를 찾아다니며 배우고 느낀 감정을 섬세하게 담고 있다. 문장만 읽는데도 이끼 냄새, 죽은 나무가 삭는 냄새, 흙냄새가 생생하다. 식물을 다룬 다른 산문집처럼 특정 종(種)의 나무가 아니라 특정 장소에 있는 나무를 다룬다는 점이 독특하다. 홋카이도 자연림에서 쓰러져 죽은 나무 위로 새롭게 자라난 가문비나무를 통해 생사와 윤회의 질서를 실감하고, 도쿄 근방의 등나무를 보며 딸을 향한 미안함을 되새기고, 혹독한 환경인 야쿠섬에 자라는 삼나무를 가난한 삶을 이기는 강인함을 엿보는 식이다. 작가의 시선은 자기 앞에 서 있는 나무를 넘어 그 나무를 지탱하는 자연과 인간으로 향한다. 작가가 바라본 나무의 삶은 인간 이상으로 치열하고 복잡하다. 조금 더 햇볕을 받기 위해 .. 2025. 5. 1. 조영주 장편소설 『은달이 뜨는 밤, 죽기로 했다』(마티스블루) 소설을 읽는다기보다는 작가의 과거와 현재를 들여다보는 기분이 들었다. 시간 여행을 다룬 판타지이지만, 마냥 판타지로 느껴지진 않았다. 무심코 읽으면 동화 같지만, 한 꺼풀 들춰 보면 참으로 냉혹한 세상이다. 작가가 힘든 세월을 꽤 많이 겪어왔음을 간접적으로 경험했고, 그 세월 속에서 소설 쓰기는 천형이면서 동시에 구원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름다운 추억의 첫 페이지에는 항상 힘든 기억이 놓여있는데, 그 추억이 현실이 고단함을 잠시 잊고 앞으로 나아갈 힘이 되어주지 않던가. 책을 서재에 꽂아 넣으며 한강 작가가 던진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거대 담론이 아니어도 유효한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마다 인생 그릇이 다르듯이 감당할 수 있.. 2025. 5. 1. 김금희 장편소설 『첫 여름, 완주』(무제) 출판사 무제를 운영하는 박정민 배우가 총괄 프로듀서를 맡아 시각장애인을 위한 오디오북으로 선공개된 작품이다. 오디오북 녹음에 준면 씨를 비롯해 고민시, 염정아, 최양락, 김도훈, 김의성, 배성우, 류현경 등 여러 배우가 재능 기부로 참여했다. 준면 씨 덕분에 이 작품을 출간 전에 읽고 들을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이 작품은 친한 언니에게 사기를 당한 주인공이 돈을 찾으려고 언니의 고향에 들렀다가 벌어지는 다채로운 이야기를 그린다. 로그라인만 보면 복장 터지는 이야기일 것 같은데 의외로 싱그럽고 상큼하다. 문장 곳곳에서 계절감이 느껴지고, 주인공의 일상이 눈앞에 수채화처럼 그려진다. 비 온 뒤 아침 공기 같은 작품이다. 어떻게 보면 뻔한 치유물인데, 그 특유의 계절감이 뻔한 이야기를 뻔하지 않게 만들어 .. 2025. 4. 30. 문지혁 산문집 『소설 쓰고 앉아 있네』(해냄) '채널예스'에 연재됐던 시절에 꼬박꼬박 챙겨 읽었던 글을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 당시 고정 독자 상당수는 작가와 작가 지망생이지 않았을까. 연재를 읽을 때마다 "나도 그래!"라며 로커처럼 헤드뱅잉을 했다. 웃기고 싶은데 겸연쩍어 대놓고 웃기지는 못하는 작가 특유의 유머도 좋았다. 읽으면서 꽤 많은 걸 새롭게 배웠다. 오토픽션을 비롯해 서사, 플롯, 이야기 등 희미하게 알고 있던 개념도 선명해졌다. 내가 지금까지 왜 그렇게 소설을 써왔는지, 왜 1인칭 주인공 시점에 집착하는지, 왜 그런 플롯을 쓰는지 이 산문집을 통해 알았다. 교재로 사용해도 좋을 만큼 내용이 풍성하다. 다정하면서도 사려 깊은 선생님의 수업을 닮았다. 공감하며 따로 체크해둔 부분이 적지 않다. 우리가 쓰는 이야기는 우리의 평범함이 실은 .. 2025. 4. 30. 김애란 外 4명 소설집 『음악소설집』(프란츠) 음악소설집이라고 말하기에는 음악의 비중이 높지 않아 고개를 갸우뚱했다.다른 제목이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말이다.전체적으로 따뜻하면서도 서늘하다.'따뜻하다'와 '서늘하다'는 양립하기 어려운 단어인데, 이 소설집 위에선 그게 가능하다.그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순 없다.봄보다는 여름에 읽으면 더 좋을 소설집이다.소설집에 실린 단편 중 가장 짧았지만 윤성희 작가의 「자장가」가 가장 음악소설다웠다.페이지를 넘기는 동안 이제 볼 수 없는 많은 사람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내가 좋아하는 노래인 아이유의 '무릎'을 소설로 읽으니 가슴이 뭉클했다. 2025. 4. 30. 패노니카 드 쾨니그스워터 『재즈 거장들의 세 가지 소원』(안목) 저자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상속녀로 젊었을 땐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일원으로 나치에 저항했고, 이후 뉴욕에서 살며 재즈 뮤지션들의 든든한 후원자로 활동했다. 이 책에는 저자가 폴라로이드로 촬영한 많은 재즈 뮤지션의 모습이 담겨 있다. 그 어떤 연출도 없이 자연스러운, 그래서 더 희귀한 전설적인 재즈 뮤지션의 일상이 설명하기 어려운 감동을 선사한다. 저자가 사진으로 담은 뮤지션들에게 세 가지 소원을 묻는다. 대답 또한 날것 그대로다. 그야말로 전설 그 자체인 뮤지션들의 대답이 이렇게 속되고도 성스럽다니. 그래서 더 감동적이었다. * 존 콜트레인 1. 고갈되지 않는 신선한 음악을 갖는 것...난 지금 진부함. 2. 질병이나 건강 악화를 방지해 줄 면역력 3. 정력이 지금보다 세 배 강해지는 것 * 빌 에번스 소.. 2025. 4. 29. 남무성 음악 만화 산문집 『스윙라이프』(부커스) 작가의 전작인 『Paint It Rock』, 『Jazz It Up!』처럼 방대한 음악 지식과 뒷이야기를 흥미로우면서도 어렵지 않게 풀어낸다. 다루는 내용이 재즈처럼 즉흥적인 부분이 많다. 일반적인 칼럼처럼 글로 썰을 풀다가, 느닷없이 만화가 글을 대신한다. 때로는 "이런 것까지 굳이?" 싶을 정도로 깊이를 보여줄 때도 있다. 재즈와 추상화를 비교하며 긴장과 이완이라는 공통점을 발견하고, "관측하는 순간 변화한다"는 양자물리학을 호출해 재즈 역시 감상하는 순간 바뀐다고 썰을 푼다.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 위에 베토벤의 「전원 교향곡」이 겹치고, 죽음을 이야기하며 모차르트와 가브리엘 포레의 「레퀴엠」을 언급하다가 자연스럽게 루이 암스트롱의 레퀴엠 「St. James Infirmary」, 찰스 밍거스의 「.. 2025. 4. 29. 이전 1 ··· 6 7 8 9 10 11 12 ··· 222 다음